[SIU 보험조사파일] "실수로 추락"…'차사고 블랙박스'로 고의 들통
[※ 편집자 주 = 지난해 보험사기로 적발된 인원은 9만3천명, 적발 금액은 8천800억원입니다. 전체 보험사기는 이보다 몇 배 규모로 각 가정이 매년 수십만원씩 보험료를 추가로 부담하는 실정입니다. 주요 보험사는 갈수록 용의주도해지는 보험사기에 대응하고자 보험사기특별조사팀(SIU)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SIU 보험조사 파일' 시리즈는 SIU가 현장에서 파헤친 주목할 만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작년 1월 동해안 지방도로에서 자동차 한대가 약 20m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차량은 처참하게 찌그러졌고, 절벽 아래쪽에 있는 구조물도 함께 파손됐다.
운전석에 탄 40대 초반 남성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에어백이 터지며 충격을 흡수한 덕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깨어난 운전자 A씨는 절벽 주변 빈 공간에 주차한 후 절벽 반대 방향으로 후진하려 하다 실수로 전진 기어를 넣어 추락했다고 자동차보험사에 진술하면서 차량 전손(완전 손상) 처리와 구조물 피해 보상을 함께 요청했다.
보험사는 그러나 추락 현장 도로와 지형, 기타 조사 내용을 토대로 A씨가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의심했다.
사고 수습작업 중 차에서 발견된 A씨의 유서는 '고의 사고' 정황을 뒷받침했다. A씨는 유서의 존재에 대해 "유서쯤이야 누구나 한번씩 쓸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고의 추락을 부인했다.
하지만 자동차에 내장된 사고기록장치(Event Data Recorder) 분석 결과는 A씨의 설명과 상반된 방향을 가리켰다.
보험개발원 자동차기술연구소가 분석한 EDR 기록에 따르면 자동차는 추락 직전 우회전을 한 후 가속페달이 작동됐으며, 추락 직전 속도는 시속 37㎞로 나타났다.
만약 A씨의 말대로 주차 후 절벽 반대방향으로 후진을 하려 했다면 EDR에는 차량이 정지한 후 서서히 움직인 것으로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보험사가 EDR 데이터를 들이밀자 A씨는 그제야 보험금을 타려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털어놨다. A씨가 경위를 실토하고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면서 사고는 형사사건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고의로 추락사고를 내 전손 처리 보험금을 타내려 할 때에는 빈 차량을 밀어서 추락시키는 게 일반적"이라며 "A씨는 차량에 탑승한 상태로 추락했으므로 EDR 정보가 없었다면 고의 추락을 입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A씨를 실토하게 만든 EDR는 자동차 사고와 충돌 정보를 기록하는 장치로, 항공기 블랙박스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의미에서 '차 사고 블랙박스'로도 불린다.
EDR에는 충돌 전 차량속도, 가속페달 상태, 브레이크 작동 여부, 엔진 회전수(rpm)에다 충돌 후 속도변화(가·감속), 에어백 작동 여부, 다중 충돌 순서, 차량 진단 데이터 등이 기록된다. 충돌 시점 안전띠 착용 여부와 에어백 경고등 작동 상태 등도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15년 말 EDR 내장 의무가 시행됐다.
차량 급발진 의심사고가 대부분 운전자 실수로 가속페달을 작동한 것으로 결론 나는 주요 근거가 바로 EDR의 가속페달 작동 기록이다.
EDR는 원래 에어백 정상 작동 여부를 알고자 고안된 전자장치이지만 점차 진화해 충격 직전부터 직후까지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기 때문에 사고 원인과 책임 소재 규명에 유용하게 쓰인다.
작년 10월 보험개발원은 국산 렌터카가 수입차를 추돌한 사건의 EDR 분석을 의뢰받았다.
수입차 운전자는 렌터카에 들이받히면서 2차로 구조물에 충격하게 됐다고 사고 경위를 설명하며 차량 전손 처리 보험금(1억원)을 요구했다.
보험사 SIU는 렌터카의 인공위성위치정보(GPS) 정보 등을 근거로 수입차와 렌터카를 이용해 대물 보험금을 노린 보험사기 가능성을 제기했다.
렌터카는 사고를 내도 운전자에게 보험료 할증이 되지 않아 가해자에게 경제적 손실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도 혐의에 무게를 싣는 대목이다.
EDR에 남은 속도 변화 기록은 수입차가 추돌을 당한 결과로 구조물에 충돌한 게 아니라 먼저 구조물을 들이박은 후 추돌을 당한 정황에 부합했다.
보험사는 사기 혐의를 밝혀달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EDR는 사고 전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불충분하다.
보험개발원 손정배 기술연구2팀장은 5일 "EDR가 제공하는 정보가 제한적이고, 데이터 오류·손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며, "EDR 기록이 다른 정보와 부합할 때 사고 경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EDR는 순간적으로(0.25초) 시속 8㎞ 이상 속도변화를 일으킨 충격 전후를 기록하므로 보행자를 치는 사고는 대체로 기록되지 않는 등 활용에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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