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제주, 화산섬의 속살 ③제주의 숨골…곶자왈 속으로
교래삼다수 마을의 교래 곶자왈과 삼다수 숲길
(제주=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수만 년 전 흘러내린 용암이 식으면서 크고 작은 바윗덩어리로 쪼개졌다. 그 바위틈 사이로 물이 흘러 습기를 품자 이끼가 앉았다. 나무들도 바위 틈새를 뚫고 힘겹게 뿌리를 내렸다.
나무와 바위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온 덕에 아무리 심한 비바람이 불어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다.
인간에게 외면받았던 척박한 땅 위에서 자연은 그렇게 끈질기게 생명을 싹틔웠다. 버려진 땅은 덕분에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었고, 제주에 숨을 불어넣는 허파가 됐다.
◇ 버려진 땅 곶자왈, 제주의 허파가 되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덤불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진 단어다. 용암이 식어 굳은 돌무지 위에 갖가지 식물이 어수선하게 뒤엉켜 자란 숲을 말한다.
곶자왈은 제주도 곳곳에 있다. 섬 전체 면적의 약 6.1%를 차지한다.
한라산 동쪽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교래 곶자왈은 제주도의 여러 곶자왈 가운데 가장 높은 지대에 형성된 것이다.
230㏊의 방대한 면적에 교래자연휴양림이 조성돼 있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곶자왈의 원형을 잘 관찰할 수 있다.
휴양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숲이 뿜어내는 기운이 청량하다 못해 차갑다.
사방은 온통 초록빛이다. 딱딱한 바위로 뒤덮인 바닥에는 이끼와 양치식물이 가득하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뿌리 내린 나무들은 제멋대로 휘어지고 구부러진 채 가지를 뻗어 하늘을 가렸다.
이끼로 뒤덮인 나무를 칭칭 감고 자란 또 다른 나무는 뱀처럼 넝쿨을 길게 늘어뜨렸다.
흙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돌무더기 위에 어떻게 이렇게 풀이 돋아나고 나무가 우거질 수 있었을까.
걷는 내내 그저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돌무더기 위에 자라난 나무들은 토양이 부족한 탓에 뿌리가 땅 위로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뿌리는 평평한 판을 세워놓은 것처럼 위로 솟아 있다.
이런 모양의 뿌리를 판근이라고 한다. 딱딱한 돌 때문에 뿌리를 아래로 내리지 못하고 위로 키운 것이다.
곶자왈 지대는 평평한 평지가 아니라 물결치듯 완만하게 굴곡진 모양새다. 어느 부분은 움푹 들어가고 어느 곳은 불룩 튀어나왔다. 끈끈한 용암이 천천히 흐르면서 굳은 탓에 생성된 요철 지형이다.
움푹 팬 곳으로는 빗물이 흠뻑 스며들어 양치식물이 잘 자란다. 스며든 빗물은 겹겹이 쌓인 바위 틈새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깨끗하게 자연 정화되어 용천수로 다시 태어난다.
땅속으로 난 작은 굴처럼 생긴 구멍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숨골'이다. 움푹 팬 숨골에 손을 넣어보니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숨골은 곶자왈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는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를 내뿜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를 뿜어낸다.
무더운 여름날 곶자왈에 들어오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도 숨골 덕분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여름철 곶자왈 숲 안의 PET(Physiological Equivalent Temperature : 기온, 상대습도, 풍속, 평균 복사온도를 종합해 산출한 열 쾌적성 지수)는 인근 거주지역보다 12.1도나 낮다고 한다.
정희준 해설사는 "바깥 기온이 31도까지 올라간 날 곶자왈에 들어서자마자 온도를 재보니 27도였고, 차가운 공기가 나오는 깊숙한 곳은 8도까지 떨어졌다"며 "자연이 만든 천연 에어컨인 셈"이라고 말했다.
숨골의 보온·보습 효과 덕분에 곶자왈에서는 난대수종과 온대 수종이 공존하는 독특한 식생을 보인다.
아열대 지방에서 올라온 종가시나무와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단풍나무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겨울에도 풀이 자라는 덕분에 한라산에 살던 노루들이 먹이를 찾아 곶자왈로 내려와 머물기도 한다.
실제로 숲속 곳곳에서 노루들의 은신처인 노루 굴을 볼 수 있었다.
교래자연휴양림에는 왕복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생태관찰로(2.5㎞)와 해발 598m의 큰지그리오름까지 이어지는 오름 산책로(7㎞)가 있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옛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산전 터와 가마터, 움막 터도 만날 수 있다.
곶자왈 중심지역은 바위 때문에 경작할 수 없었지만, 경작이 가능한 손바닥만 한 평지에 화전민들이 가시덤불을 태운 뒤 피 같은 작물을 경작했다고 한다.
◇ 인공림과 자연림의 조화 '삼다수 숲길'
교래 곶자왈이 있는 교래삼다수 마을은 곶자왈 외에도 교래리 퇴적층, 맨틀 포획암, 산굼부리(천연기념물 제263호) 등 다양한 지질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2018년 유네스코 지질공원 핵심 명소로 지정됐다. 지질 명소 13곳 중 가장 최근에 인증받은 곳이다.
삼다수 공장 인근의 삼다수 숲길에는 지질 트레일이 조성돼 있다. 다채로운 숲길을 걸으며 잘 보존된 화산지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삼다수 숲길이 정식 개장한 것은 지난 2010년이다.
삼다수 공장을 운영하는 제주특별자치도 개발공사와 마을 주민들이 과거 말몰이꾼이나 사냥꾼들이 지나다녔던 임도(林道)를 활용해 숲길을 조성했다.
숲길 대부분은 삼다수 공장 소유지다. 공장 인근 지대가 경작지로 사용될 경우 지하수가 오염될 것을 염려해 공장 측이 사들였다고 한다.
삼다수 숲길의 매력은 다채로움에 있다.
잘 정돈된 삼나무 길을 한참 걷다 보면 이 나무 저 나무가 어지러이 얽힌 곶자왈 형태의 숲이 나온다.
용암이 흘러 굳으면서 생긴 기암괴석도 볼 수 있다.
탐방객이 북적이지 않아 호젓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교래종합복지회관에 주차하고 출발한다면 맞은편 이정표를 따라 목장길을 지나야 숲길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부터 빽빽한 삼나무 길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쭉쭉 뻗은 삼나무들은 잎새뿐 아니라 줄기까지 파릇파릇하다. 높은 습도 덕분에 바닥의 바위뿐 아니라 나무줄기에도 이끼가 덮였다.
줄기부터 잎새까지 초록색으로 뒤덮인 나무들 사이를 걸으니 온몸이 초록빛으로 물들 것만 같다.
이 삼나무 숲은 1970년대 정부가 치산녹화사업을 하면서 조성한 인공림이다. 육지에서는 주로 소나무를 심었지만, 바람이 거센 제주에서는 방풍을 위해 삼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삼나무를 쑥대낭이라고 부른다. 대나무처럼 빨리빨리 쑥쑥 자란다는 뜻이다.
초록 샤워를 즐기며 삼나무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숲의 풍광이 달라졌다.
곧게 뻗은 인공림의 나무들과 달리 이리저리 굽은 나무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
단풍나무부터 졸참나무, 정금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까지. 단풍나무와 때죽나무가 한 몸이 된 연리목도 눈에 띈다. 바닥에는 제주조릿대가 가득하다.
제멋대로 자란 자연림은 잘 정돈된 인공림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숲길 옆으로는 하천이 흐른다. 제주도에서 가장 긴 하천이라는 천미천이다.
한라산 중턱 1100고지에서 발원해 교래리와 성산읍을 거쳐 표선면 하천리 바다로 이어진다.
표선면까지 오름 40개를 휘어 감고 돌면서 작은 지류 60개가 합쳐진다고 한다.
천미천은 평상시에는 말라 있다가 폭우 때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이다. 덕분에 용암이 흐르면서 만들어놓은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울퉁불퉁한 바위 곳곳에는 구멍이 움푹 패 있다. 그 안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도 보인다.
움푹 팬 곳은 용머리 해안에서도 봤던 돌개구멍이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바위의 작은 틈에 자갈이나 이물질이 들어가 흐르는 물과 함께 빙빙 돌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제주도 특유의 목축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잣성'도 만날 수 있다. 잣성은 조선 시대 목초지에 쌓았던 목장 경계용 돌담이다.
목장이 섬 전역에 흩어져 있어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자 목장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기고 경계에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해발 150∼250m에 쌓은 것은 하잣성, 350∼400m에 쌓은 것은 중잣성, 450∼600m에 쌓은 것은 상잣성이라고 한다. 삼다수 숲길에서 볼 수 있는 잣성은 상잣성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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