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스마트] 대역병의 시대, 공멸로 몰아넣는 '트롤링'
(서울=연합뉴스) 홍지인 기자 = '매트릭스' 3부작은 가상과 현실을 잇는 세계관 속에 수많은 철학·종교적 함의를 담아낸 걸작 공상과학(SF) 영화다.
서사의 후반부를 끌고 가는 큰 줄기는 가상의 세계 안에서 바이러스처럼 무한 증식하는 악당 '스미스'를 주인공 '네오'가 물리치고 평화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바이러스로 위기에 빠진 가상 세계란 플롯은 이 영화가 나온 이후에 실제로 일어났다.
2005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와우)' 게임에서 일어난 '오염된 피' 사건이다.
당시 전 세계에서 400만명이 접속해 즐기던 와우의 세계에서 갑자기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학카르'란 새로운 몹이 퍼뜨린 '오염된 피'라는 전염병은 원래 '줄구룹' 구역에서만 발병하도록 설계됐지만, 게임의 버그로 대도시에 있는 캐릭터도 감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게이머들은 원인도 모르고 치료약도 없는 이 전염병의 창궐에 손쓸 틈도 없이 당해나갔다. 온통 뼈 무덤 천지였다.
처음에 이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개발·운영사 블리자드는 대도시 출입을 통제하고 감염자를 격리하는 등 조치로 게임 속 세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트릭스와 달리 와우의 세계는 구원될 기미가 없었고, 결국 운영진은 깨끗이 서버를 리셋(초기화)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이 사건은 의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전염병 창궐 사태 속에 게이머들이 보여준 행태가 주된 연구 주제였다.
'오염된 피'가 퍼지자 게임 내에서 서로를 치료해주거나 감염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구석에서 홀로 지내는 선량한 이용자도 있었다.
그러나 전염병을 더 퍼뜨리려고 일부러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는 행동도 눈에 띄었다. 온라인 게임에서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장난, 이른바 '트롤링'으로 불리는 짓이다. 그리고 이런 트롤링은 사태를 심각하게 몰고 간 주요 요인이었다.
미국 터프츠대 의학대학원 니나 페퍼만 교수는 의학계의 저명한 저널 '랜싯'에 기고한 논문에서 "블리자드의 조치는 질병의 전염성이 매우 강하고 오염 지역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뿐 아니라 이용자의 저항 탓에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에 비춰보면 어떨까.
코로나19가 창궐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어떤 종교 집단은 보건당국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 은폐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또 다른 종교 단체는 이번 주말 도심 한가운데서 집회를 열겠다고 한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가상과 실제가 분리된 것처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네 현실에는 네오도, 서버 리셋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세계를 위협하는 이런 현실 속 트롤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ljungber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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