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국가 伊 안락사 합법화 길 트나…안락사 방조에 무죄 선고
밀라노법원 "범죄로 볼 수 없어"…'항상 범죄 아냐' 헌재 결정 반영
의회 차원 입법 논의 불가피 전망…우파 정당·가톨릭계는 극렬 반대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이탈리아 법원이 안락사를 도운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린 이후 나온 형사 판결로 안락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한층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ANSA 통신에 따르면 밀라노 법원은 23일(현지시간) '죽을 권리' 옹호 활동가이자 급진당 당원인 마르코 카파토의 살인방조 등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사건은 이탈리아의 유명 음악 프로듀서로 'DJ 파보'로 알려진 파비아노 안토니아니가 외국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여행과 오토바이 경주를 즐기던 안토니아니는 2014년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되고 시력까지 상실했다.
삶을 지속할 의지를 잃은 그는 2017년 2월 카파토의 도움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로 건너가 죽음을 택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다.
카파토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직후 재판에 넘겨졌다. 이탈리아 법은 극단적 선택을 돕거나 방조할 경우 최소 5년에서 최장 12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날 선고 공판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며 카파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헌재가 지난 9월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돕는 일이 항상 범죄는 아니라고 결정한 것을 반영한 판결이다.
헌재는 당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한 사람의 헌법적 권리라면서 이같이 결정했다.
헌재 심리는 카파토 사건을 맡은 밀라노 법원이 관련 처벌 규정을 담은 형법 580조의 합헌성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뤄졌다. 헌재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공판은 보류됐다.
헌재 결정의 취지에 맞게 재판에 참여한 검찰도 카파토에게 무죄를 구형했다고 한다.
카파토는 "나는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위해 행동했다"며 법원 판결을 환영했다.
카파토에 무죄 선고를 요청한 티치아나 시칠리아노 검사도 "법원의 결정은 국가가 아닌, 개인을 사회적 삶의 중심에 놓은 헌법 조항을 완전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현지 시민사회에서는 이번 판결이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가 안락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본다.
헌재에 이어 일선 법원도 안락사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림에 따라 의회 차원의 입법 논의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법안을 만들고 심의·의결하는 이탈리아 의회는 2013년 이래 안락사 이슈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헌재도 작년 10월 안락사가 위법인지를 법적으로 명확히 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했으나 후속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파비아나 다도이네 시민부 장관도 "의회가 (안락사 관련) 우려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문명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며 조속한 입법 논의를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연립정부의 한 축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 소속으로 하원 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프란체스카 부지나롤로는 "이번 판결에서 확립된 법적 원칙이 사법시스템에 반영될 것"이라며 "현재 관련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극우 정당 동맹을 비롯한 우파 성향 정당들과 바티칸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종교계가 안락사의 법적 인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향후 논의에 진전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최근 의사단체를 접견한 자리에서 조력 자살이나 안락사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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