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격화 에콰도르에 통금령…정부건물 방화·언론사 피습(종합)
수도 키토에 수십 년 만에 통행금지령…30여명 체포
군 통제로 질서 되찾아…모레노 대통령, 일부 긴축완화책 시사
(뉴욕·서울=연합뉴스) 이귀원 특파원 현윤경 기자 = 유류 보조금 폐지에 항의하는 에콰도르 원주민 시위가 격화하는 가운데, 급기야 수도 키토의 정부 건물이 시위대의 방화로 불에 타고 언론사들이 습격을 받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수도 키토와 주변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군(軍)에 의한 통제를 명령했다고 AP, AFP 통신이 보도했다.
모레노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부통령, 국방장관을 대동한 채 대국민 연설에 나서 오후 3시를 기해 24시간 통행금지 조치를 발령하고, 혼란에 빠진 키토 시내의 질서 회복을 위해 군대가 통제에 나서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에콰도르에 24시간 통금령과 군 통제령이 발령된 것은 쿠데타가 빈발했던 지난 1960년대와 1970년대 이래 수십 년 만에 처음이다.
모레노 대통령은 "이번 명령은 묵과할 수 없는 폭력 사태에 공권력이 효율적으로 맞서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며 "합동군사령부가 필요한 조치와 작전을 즉각 수행토록 했다"고 설명했다.
모레노 대통령의 연설에 앞서 AFP통신은 시위대가 이날 감사원이 자리 잡은 키토의 정부 건물에 불을 질렀다고 보도했다.
AP통신도 마스크를 착용한 수명의 남성 시위대가 해당 정부 건물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면서 건물 내부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장면이 목격됐다고 전했다.
감사원 건물에 불이 난 직후 키토 시내에 위치한 민영방송 텔레아마조나스와 유력지 엘코메르시오 본사도 습격을 당했다.
텔레아마조나스는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복면 괴한들이 돌을 던져 자사 창문을 깨뜨리고, 차량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내보냈다. 괴한들의 공격으로 이 방송국 직원 25명이 긴급 대피했으나, 다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엘코메르시오 신문사는 괴한들이 한때 경비원들을 억류했으나, 경찰이 출동하자 달아났다고 밝혔다.
모레노 대통령은 그러나 대국민 연설에서 감사원 방화 공격을 저지른 복면 시위대는 유류 보조금 폐지에 항의하는 원주민 시위대와 무관하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원 방화 사건의 배후로 마약 밀매업자와 조직 범죄단,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을 지목했다.
코레아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재임했던 모레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 코레아 정부 시절 급증한 공공 부채 감축에 적극 나서면서 코레아 전 대통령과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모레노 대통령은 미국의 '눈엣가시'인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지지를 등에 업은 코레아 전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이 원주민 세력을 이용, 에콰도르 정부의 전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금령이 발효된 지 몇 시간 만인 이날 밤까지 에콰도르 군대는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격렬히 맞붙은 의회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와 공원 등에 대한 통제를 되찾았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부패 사건 수사의 증거물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감사원 건물의 불도 소방대가 진압했다.
에콰도르가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된 나라 중 한 곳으로 꼽히던 터라, 에콰도르인들은 정부 건물이 불에 타고, 방송국들이 습격을 당한 폭력 사태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리아 파울라 로모 내무장관은 감사원 건물 공격에 연루된 용의자 30명을 체포했다고 말했다. 지난 3일 유류 보조금 폐지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6명이 사망하고, 2천100명이 다치거나 체포됐다.
이런 가운데, 유류 보조금 폐지 항의 시위를 주도해 온 에콰도르토착인연맹(CONAIE)은 이날 모레노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에 앞서 트위터를 통해 내부 논의를 거쳐 모레노 대통령과 "직접 대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모레노 대통령도 이날 연설에서 농촌이 국가 재원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보장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최근 소요로 수입을 잃은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며 상당수 국민의 저항에 부딪힌 일부 긴축 조치의 완화를 시사했다.
하지만, 그는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시위를 촉발한 유류 보조금 폐지 결정을 철회하지는 않아 양측이 쉽사리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17년 5월 취임한 모레노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지난 2월 40억 달러(약 4조7천억원)에 달하는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데 합의하는 조건으로 공공 지출 감축, 세금 인상, 노동 시장 유연화 등 긴축정책을 펼치고 있다.
산유국인 에콰도르는 십여 년간에 걸친 정부의 높은 재정 지출과 유가 하락으로 최근 국가부채가 급속히 치솟았다.
lkw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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