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가 67년전 남긴 문화재 전쟁 피해 기록을 보다
연세대박물관서 7월 31일까지 '서여 민영규' 기획전
1952년 10월 작성한 노트·사진 자료 첫 공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역사학자 서여(西餘) 민영규(1915∼2005)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2일 백낙준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았다.
연세대 전신인 연희대 사학과 교수인 민영규에게 경남·경북·충남·전남·전북 내 각 사찰 소장 문화재 실태조사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민영규는 '연희대학교 교수 문리과대학 강사 민영규'라고 인쇄된 글자 옆에 손수 '문교부 장관 위촉 전시(戰時) 사찰 문화재 피해상황 조사차'라고 쓴 명함을 들고는 10월 5일 부산을 떠나 대구로 향했다.
그는 다음날 경북 상주를 시작으로 예천, 봉화, 청송, 안동, 영주, 대구, 경주 등지를 돌며 한 달간 전쟁으로 인한 문화재 피해 사례와 현황을 조사했다.
조사 도중 위궤양과 위천공으로 수술을 받기도 한 민영규는 석조문화재와 건축물을 집중적으로 둘러봤다.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등 국가지정문화재 국보와 보물이 적지 않았다.
연세대박물관이 지난달 말에 개막해 7월 31일까지 여는 기획전 '서여 민영규의 1952년 10월, 전쟁피해 문화재 30일의 기록'은 한 역사학자가 전쟁 중에 문화재 조사를 하며 보인 열정과 문화재에 남은 상흔을 마주하며 느낀 감정을 전하는 전시다.
민영규는 1994년 발간된 '천혜봉 교수 정년기념하서'에서 국어학자 방종현이 1952년 세상을 떠난 사실을 언급한 뒤 "방 교수와 나는 문교부 요청으로 전란이 몰고 온 문화재 피해 상황의 현지조사를 나가야 하던 참"이었다고 위촉 상황을 전했다.
그가 당시에 문화재 조사를 했다는 사실은 이 책과 신문기사 등을 통해 알려졌지만, 조사 결과를 자세히 기록한 노트와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었다.
윤현진 연세대박물관 학예사는 12일 "민영규 선생이 2005년 작고한 뒤 유족이 연세대 학술정보원에 소장 자료를 기증했다"며 "그중 1952년 가을 조사와 관련된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를 꾸몄다"고 말했다.
그는 "민영규 선생이 정부로부터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조사하라는 위촉장을 받았지만, 경북 지역 자료만 있어서 추가 조사가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며 "경북 지역 조사 보고서가 존재하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윤 학예사는 민 교수가 조사를 하며 경험한 감정을 '애곡'(哀哭)으로 표현했다. 애곡은 소리 내서 슬프게 운다는 뜻으로, 당시 신문기사에도 사용된 단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민영규가 1952년 10월 5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한 조사 일정이 보이고, 벽에는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걸렸다.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 봉화 오전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영주 상망동 석불좌상 등은 사진과 함께 민영규가 작성한 조사 내용을 전시했다.
중앙부에는 민영규가 사용한 카메라와 명함, 그가 필사한 각종 기록을 진열했다. 또 대형 모니터에서는 민영규가 찍은 문화재 사진과 박물관이 최근에 조사하면서 촬영한 사진을 비교해 보여준다.
윤 학예사는 "총에 맞은 흔적이 있는 불상을 보면 민영규 선생이 조사 과정에서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느꼈을 듯싶다"면서도 "군사작전 지역에서도 조사를 진행한 덕분에 소중한 자료가 남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정부가 문화재 조사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라며 "우리가 일상처럼 즐기는 평화의 바탕에는 무거운 고통의 값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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