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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10 만세운동은 독립운동계 이념 통합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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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10 만세운동은 독립운동계 이념 통합 신호탄"
학술행사서 장석흥 교수 주장…"1920년대 전반 학생운동 결산 사건"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독립운동계에서 민족통합을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1926년 민족대당촉성운동은 독립운동계 지형을 재편하는 계기가 됐다. 6·10 만세운동은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1919년 3·1운동, 1929년 11·3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국내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히면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독립운동 세력 통합의 전환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6·10 만세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와 서울시교육청이 10일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연 학술심포지엄에서 6·10 만세운동에 대해 "국내외에서 다양한 주체가 참여해 혼선을 빚거나 분립했지만,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6·10 만세운동은 순종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서울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돼 독립을 외쳤다.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동맹휴학이 발생해 1천여 명이 체포됐으나 일제는 시위 규모를 축소하려고 11명만 징역형에 처했다.
장 교수는 배포된 발표문에서 "6·10 만세운동 계획은 국내가 아니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 의해 처음 구상됐다"며 "본래는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해 시위하려고 했으나, 순종이 서거하자 6월 10일 국장을 기해 만세운동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그는 "6·10 만세운동은 독립운동계 통합이 요구되던 시기에 그것의 실천적 방안으로 추진됐다"며 "만세운동에서 보여준 통일전선적 지향은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민족혁명으로 결합해 독립운동의 질적 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치 이념을 초월한 통일된 조직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자는 민족대당촉성운동 측면에서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면서 "도산은 6·10 만세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민족적 통일기관 성립을 제창했고, 1926년 10월부터 통합 움직임이 본격화했다"고 덧붙였다.
장규식 중앙대 교수도 1920년대 전반 학생운동 단체 변천을 다룬 글에서 "6·10 만세운동은 1920년대 전반 학생운동의 총결산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5월 출범한 조선학생대회가 학생계를 대표하는 문화운동 선두주자로 떠오른 이후 조선학생대회를 이은 조선학생회와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단체들이 생겨났다며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0년대 후반 학생계를 이끌어 간 대표적 사상단체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공산당 학생부에 소속된 이병립은 이선호, 이천진 등 학생과학연구회 간부와 수차례 만나 인산 당일 학생 동원과 시위 방법에 대해 논의를 거듭했다"고 덧붙였다.
김성민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6·10 만세운동 연구의 성과와 과제'를 정리한 발표에서 "6·10 만세운동 추진 주체의 연대 과정과 영향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 연구관은 "6·10 만세운동은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사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며 "국내외 민족협동전선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각 부문에 미친 영향이 실증적으로 연구되면 6·10 만세운동의 위상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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