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상가들의 말로 분석한 전후 내셔널리즘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가 쓴 신간 '민주와 애국'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본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한 사카이 사부로(坂井三郞)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인터뷰에서 "전원 죽어서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사기가 올라가겠습니까"라며 "대본영(최고 통수기관)과 위의 놈들은 올라갔다고들 합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입니다"고 항변했다.
20년 정도 지난 1966년 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는 "6년의 시간 동안 젊은이들의 의식은 내셔널리즘과 국가관에 관한 부분이 가장 크게 바뀌었다"며 "10명 중 8명이 '일본은 훌륭하다'라고 답할 것"이라고 적었다.
일본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며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정치체제가 바뀌었고, 내부에서도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사회 분위기는 이처럼 급변했다.
일본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는 두꺼운 책 '민주와 애국'에서 일본 현대 사상가들이 했던 말을 통해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변화상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거시적 프레임이 아니라 사상가의 발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저자가 중시한 점은 개인별 경험이다. 전쟁에서 어떠한 일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인 '전후'가 1955년을 기점으로 크게 달라졌다고 설명한다. 일본은 1955년 국민총생산을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했고, 고도성장을 누리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자신감도 되찾았다.
저자는 이 기간에 일본 내셔널리즘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우선 1955년 이전 제1의 전후는 사회 질서가 유동적이었고 미래는 불확실했다. 일제를 지탱한 버팀목인 일왕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지고 퇴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보수파는 헌법을 새롭게 제정하면서 일왕 자리에 반전과 평화라는 가치를 집어넣었다. 반면 전쟁에 반대한 공산당 사람들은 자괴감을 느끼면서 전시 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가를 새롭게 조명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역사학자들은 국가주의와 군국주의 사관 대신 민중 사관을 택하는 시도를 했고, 비판적 근대화를 이룬 중국과 대비해 일본이 종속적 근대화를 했다는 시각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라는 중요한 변수로 인해 정치 지형도 요동쳤다. 저자는 미국이 일본에 재무장을 요구하면서 보수 세력은 비무장을 지지하고, 진보 세력은 전면적 무력 포기를 외치게 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의 전후는 제1의 전후가 지향한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화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죄책감을 씻기 위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민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일본'에 대한 사랑을 부각했다. 제대로 된 반성도 없이 애국심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셈이다.
저자는 "전후사상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그것이 전쟁 체험이라는 국민적 경험에 의거했다는 것"이라며 "악몽 같은 전쟁이라는 공동체 의식 위에 민주와 애국의 공존 상태가 가능하게 됐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면서 "민주와 애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 이름 없는 것을, 현대와 어울리는 형태를 부여하는 바꾸어 읽기를 할 때 전후의 구속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며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만들자고 조언한다.
한편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최근 일본이 전체적으로 우경화했다는 지적은 사실과 다르다며 그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일본의 우경화는 분극화에 따른 현상으로, 사회에서 견해차가 커지는 분극화는 유럽·미국·인도에서도 나타난다며 "한국인 배척을 일본 전체의 경향으로 오해하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밝혔다.
이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자민당이 재집권하면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커져 국민의 25%가 지지하는 자민당 내에서 우파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도 우경화의 원인처럼 인식된다고 덧붙였다.
돌베개. 조성은 옮김. 1천144쪽. 6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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