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정상 밀월 속 무역협상 놓고는 '신경전'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미일 정상 간 밀월관계가 일본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까?"
올 6월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세일즈'를 위해 지난 22일부터 8일 일정으로 유럽과 북미 6개국 순방에 나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이번 여정 중 핵심은 26~27일(현지시간)의 미국 방문이었다.
아베 총리는 이번 방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밀관계를 한껏 과시했다.
26일 저녁 트럼프 대통령 부인인 멜라니아 여사의 49회 생일만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해 축하노래를 불러주고, 이튿날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통산 4번째 골프 라운딩을 하며 친교를 다졌다.
정상 외교 일정에서 공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영역이 많이 가미돼 '밀월관계'라고 표현해도 과언이라 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주요 매체들은 28일 '미일 밀월의 불협화음'(도쿄신문), '급한 성질의 트럼프 대통령, 일본 긴장'(마이니치신문) 등의 제목으로 두 나라 정상 간의 밀월 속에 감춰진 위험 요인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분석을 내놓았다.
그 배경에는 이달 시작된 양국 간의 무역협상에서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이 의도하는 페이스에 휘말려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 트럼프 "5월에라도 타결"…찡그린 아베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아베 총리와 통역만 배석한 채 45분간 단독회담을 하기에 앞서 기자단에 공개된 자리에서 양국 간 무역협상 타결 시점을 묻는 한 미국 기자의 말에 "(5월 말) 방일 때 서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협상 타결 시점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아베 총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고 한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 협상을 앞으로 한 달 남짓 만에 타결짓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일본 정부의 기본 인식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기자들이 빠진 뒤 트럼프 대통령에게 "5월 말 합의는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렇다면 협상 대표들에게 맡기자"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아베 총리는 회담이 끝난 뒤 기자들에게 "서로 윈윈하는 협상을 하자고 했다"는 말로 다소 모호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 5월 하순 타결 가능할까
트럼프 대통령이 작년 9월 아베 총리와의 합의에 따라 이달에야 본격 협상이 시작된 양국 간 무역협상을 서둘러 타결지으려는 것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빨리 성과를 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급성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해 줄 핵심층으로 여기는 농업계가 요구하는 것을 일본이 받아달라고 압박하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이번 회담 모두에서 "(일본이 부과하는) 농산물 관세를 없애거나 낮추고 싶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본은 미국이 자발적으로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작년 말 발효한 데 이어 유럽연합(EU)과의 경제연대협정(EPA)을 올 2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들 협정에 따라 농업분야에서 미국의 경쟁국인 호주, 캐나다, 유럽 국가에서 일본으로 들어오는 쇠고기, 돼지고기, 치즈 등 유제품의 관세가 낮아지고 있다.
쇠고기, 돼지고기 수출 등에서 일본이 최대 시장이던 미국 농업계는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일본은 일단 TPP나 EPA 수준 이상의 관세 혜택을 미국에 주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의 압박 강도에 따라 혜택의 폭이 조금은 커질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아베 총리 입장에선 시기가 중요한 상황이다.
올 7월에 참의원 선거라는 중요한 정치 일정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해 올 5월 하순 농산물 시장을 열어젖힌다는 발표가 나올 경우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악영향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베 정부는 절반의 의원을 바꾸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둬야 숙원과제인 개헌 추진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베 정부가 설령 미국에 양보안을 내놓더라도 그 시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5월 말'이 아니라 7월 참의원 선거 후가 될 공산이 크다.
◇ 서두르는 트럼프…일본이 얻을 것도 있다?
미일 양국이 이달 협상을 시작하면서 합의한 협상의 큰 골격은 농산물 등 물품과 전자상거래 같은 디지털 분야의 합의안을 도출하고, 그다음에 기타 무역 및 투자 관련 분야의 2단계 교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농업 분야에서 양보안을 내놓고, 트럼프 대통령이 추가관세 부과 등을 위협하는 자동차 등 다른 분야에서도 양보해야 하는 환경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의 교역에서 작년 기준으로 676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중국, 멕시코, 독일에 이어 4번째로 큰 규모로, 그중 80%가 자동차에서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서도 "미국은 일본 차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며 자동차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은 미국이 일본산 수입차에 2.5%, 미국 경쟁업체들이 주력으로 삼는 픽업트럭에는 25%의 관세를 물리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관세 부과 사실을 지적하며 반론을 제기했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대로 협상이 계속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국이 조기에 성과를 보려고 서두르는 것이 일본에 오히려 유리한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미 의회와 산업계가 농산물이나 자동차에 국한하지 않는 포괄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수준의 협상을 일본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졸속 타결은 민감한 부분을 피해갈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은 물품 및 일부 서비스 분야로 협상 범위를 최대한 좁히려 하는 반면에 미국은 금융 등 서비스와 투자규정, 환율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어 FTA 수준의 합의를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미국은 특히 수출에 영향을 주는 환율 문제도 다루자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마이니치신문은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이야말로 미일 양국의 국익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나올 경우에 대한 경계감을 일본 정부가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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