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바친 사이' 강조한 김정은, '북러 혈맹' 복원되나
비핵화 협상 정체 국면서 러·중 모두 '뒷배' 삼으려는 속내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하노이 노딜' 이후 첫 외유로 택한 러시아 방문에서 '피를 바친 사이'를 언급하며 과거 혈맹의 불씨를 살리려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끈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과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첫 회동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과거 수준으로 복원함으로써 러시아를 등에 업으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김정은 "푸틴과 한반도 문제 허심탄회 대화"…회담 마치고 만찬 / 연합뉴스 (Yonhapnews)
김정은 위원장은 25일 푸틴 대통령이 마련한 연회에서 답사를 통해 "오랜 역사적 뿌리와 전통을 가진 조러(북러) 친선의 유대를 끊임없이 이어나가며 격변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조로관계 발전을 가일층 추동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안고 러시아 연방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특히 "두 나라 인민은 일찍이 지난 세기 항일대전의 공동의 투쟁 속에서 전우의 정으로 굳게 결합했으며 (소련군)장병들은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자신들의 피를 아낌없이 바쳤다"면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항일대전'은 8·15광복 전 김일성 주석의 소련군 활동과 소련군의 북한 지역 상륙을, '조선해방'이란 6·25전쟁 시기 소련군의 참전과 지원을 각각 의미하는 것으로, 과거 냉전시기 정치·군사적으로 밀착했던 혈맹 관계를 상기시킨 셈이다.
푸틴 대통령과 첫 만남을 기회로 향후 양국 관계를 피를 나눴던 과거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읽힌다.
심지어 김 위원장은 "조선 인민은 러시아 인민에 대하여 언제나 친근하고도 형제적 감정 품고 있으며 러시아와 같은 위대한 나라를 가까운 이웃으로 두고 있는 것을 긍지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러시아는 스탈린 시절인 1945년 9월 소련군 대위의 군복을 입고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 주석이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면서 북한의 절대적 후원국이자 혈맹이었으나, 중소 분쟁과 냉전체제 종식 등에 직접적 영향을 받으며 부침을 거듭했다.
특히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러시아가 1995년 혈맹 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조·러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더는 연장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특수했던 양국 관계는 일반적인 국가 관계로 바뀌었다.
2000년대 들어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답방하면서 회복세를 보이긴 했지만, 경제적 이해관계에 머물렀다.
더욱이 북한의 대외무역 의존도는 중국에 쏠려 있었고, 김정은 위원장도 지난해 껄끄러웠던 대중 관계 회복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상대적으로 러시아를 소외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한반도 정세가 다시 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과 함께 러시아에도 눈을 돌리며 전격 방문에 나서 관계 복원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문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이해관계를 의식한 듯 "전략적이며 전통적인 조러 친선관계를 새로운 높이에서 새 세기 요구에 맞게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켜 나가려는 것은 확고부동한 입장이고 전략적 방침"이라고 밝혔다.
특히 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전 세계 초점이 조선반도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문제를 같이 평가하고 서로의 견해를 공유하고 또 앞으로 공동으로 조정 연구해 나가는 데 대해서 아주 의미 있는 대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월 네 번째 방중에서도 김 위원장은 한반도 정세관리와 북미 관계·비핵화 협상 전 과정에서 중국과 "공동 연구·조정" 논의를 공식 표명, 한반도 문제와 북한의 대외전략에서 핵심행위자로서 중국의 지위와 안전판 역할을 부각했다.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데다 대북 제재를 주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인 중국과 러시아 모두를 북한의 지원군이자 뒷배로 삼으려는 김정은 정권의 외교적 전략이 읽힌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미 지난해 시작된 한반도의 정세 변화 속에서 중국에 먼저 손을 내밀며 1년도 안 된 사이에 4차례 방중, 집권 이후 내내 껄끄러웠던 북·중 관계를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회동 때마다 '피를 나눈 형제국가', '운명공동체', 한동안 안 써왔던 '순치의 관계'까지 언급하며 과거 혈맹의 불씨를 살리는데 의기투합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이번 러시아 방문 및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주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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