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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기행 르포] 춘래불사춘, 제주의 4월 속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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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기행 르포] 춘래불사춘, 제주의 4월 속은 그랬다
비 제주 출신 기자에게 다가온 '미처 몰랐던 제주의 아픔'
아직 씻기지 않은 흔적들…발걸음 옮길 때마다 가슴 한쪽 쓰라려


(제주=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마을 숲속에 온종일 숨어 있다가…."
4·3 당시 통째로 불에 타 사라졌다는 마을 '무동이왓'에서 만난 당시 11살 소녀 홍춘호(82) 할머니 기억이다.
7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할머니 얼굴엔 70여년전 어린 소녀를 짓눌렀던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했다.
옛 마을 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어진 할머니의 증언은 제주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기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무동이왓'에는 4·3 당시 130여 가구가 살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마을이 불에 타 지금은 터만 남았다고 한다.
할머니도 19살 오빠와 5살, 2살 동생을 잃었단다.
할머니는 광란의 도가니 같았던 무등이왓 인근 길이 180m 정도 되는 큰넓궤(동굴)에서 50일가량을 숨어 지내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함께 탈출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모두 숨졌다.
82세 노파 미간이 떨렸다.
그의 71년 전 아픔과 삶의 역경이 고스란히 기자의 가슴에 전해졌다.

부산에서 온 기자는 제주 4·3을 잘 알지 못한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는 정도로 기억했지 왜 발생했고, 왜 조명되지 못했는지 모른다.
기자에게 제주는 아픔과는 거리가 먼 도시다.
오히려 숨 가쁜 일상과 도시에서 탈출한 수많은 현대인을 보듬어 주는 곳으로 기억된다.
연간 1천500만명이 찾는 제주도.
대다수 사람이 그렇듯 기자에게도 제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청정 관광명소였다.
4·3 아니 제주를 잘 알지 못하는 기자가 4·3을 이해하기 위해 평화기행에 참가했다.
이번 행사는 제주도기자협회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4·3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전국 언론인 초청 행사다.
평화기행을 위해 제주 관문 제주국제공항에 내렸다.
이곳이 4·3 때 학살과 암매장이 이뤄진 장소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2007년부터 2년 동안 진행된 발굴작업을 통해 활주로 옆에서 388기 유해와 2천여점의 유품이 수습됐다고 한다.

공항을 출발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4·3 평화공원.
평화공원은 4·3 사건이 발생한 지 60여년이 지난 2008년 피해자 명예회복과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개관했다.
1만5천위의 희생자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추모공관과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제주 4·3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제주 오름을 올랐다.
송악산 입구 쪽에 위치한 섯알오름에 오르자 일제강점기 일본이 제주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확보하기 위해 만든 진지동굴과 고사포 진지 등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 이후 전향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사전에 처리한다는 '예비검속'에 따라 섯알오름에 끌려온 200여 명이 학살돼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제주 3대 해수욕장 중 하나인 함덕해변.
에메랄드빛 봄 바다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서우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아픈 역사가 있었다.
4·3 당시 함덕 해변 옆 서우봉 절벽에서는 북촌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고 한다.
관광지로만 알려진 제주에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토록 아픈 역사가 숨어 있었다니…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홍 할머니를 만난 사라진 마을 '무동이왓'.
마을 모양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는 뜻에서 '무동이왓'으로 불린다.
할머니는 전국에서 모인 기자 80여명에게 71년 전 자신이 보고 느낀 제주의 아픔에 대해 생생하게 토해냈다.
할머니가 전하는 생생한 71년 전 비극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샛노란 봄이 찾아온 제주는 눈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71년 전에도 봄이 찾아왔을 이곳 제주에서 그런 비극이 벌어졌던 말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 섬 곳곳에서 당시 수많은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과 더불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제주 4·3은 그간 조명되지 못했을까.
제주 4·3사건 특별법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희생자는 약 2만5천∼3만여 명에 달했는데 당시 제주 전체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숫자다.

제주 4·3사건은 항쟁인지 학살인지 아직도 정명(正名)을 찾지 못했다.
소요 주동자가 월북하고 군경에 맞서 싸우던 무장대에 의해서도 제주도민들이 일부 희생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해발굴 작업도 정권 색깔에 따라 멈췄다 재개했다를 반복한다.
이여숙 제주 4·3 문화관광해설사는 "대한민국 현대사 중 가장 아픈 역사지만 4·3을 바라보는 다양한 견해와 이견 때문에 조명되지 못했다"며 "미완성된 4·3 역사를 완성하려면 제주를 넘어 육지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handbrother@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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