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연 지사님, 늦었지만 이제 대한민국에 모시겠습니다"
中 상하이서 잠든 독립운동가 김태연, 100년만의 귀국
상하이 외국인 묘지서 유해 꺼내 임시 안치…4월 8일 한국 도착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국 상하이의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 김태연 지사(1891∼1921년)의 유해가 그의 사후 근 100년 만에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 돌아온다.
28일 오전 상하이시 창닝(長寧)구에 있는 외국인 공동묘지인 만국공묘(萬國公墓).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김 지사의 무덤에서 유해를 꺼내는 파묘(破墓) 행사가 진행됐다.
김 지사의 외손자인 조관길씨와 국가보훈처·주 상하이 총영사관 등 정부 관계자, 상하이 교민 대표 등 참석자들은 파묘에 앞서 먼저 'TAI Y KIM'이라는 영문 이름이 적힌 묘비에 헌화하고 묵념을 했다.
이어 만국공묘의 중국인 직원들이 작은 돌 묘비를 들어 올리더니 삽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조금씩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가량의 작업 끝에 1.5m가량 깊이에 놓인 김 지사의 유해가 담긴 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해 단지는 다시 미리 준비된 흰 나무 상자에 담겼고, 유족 대표인 조씨와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그 위에 천천히 태극기를 덮어 감쌌다.
이어 김 지사의 유해가 실린 영구차는 상하이시의 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김 지사의 유해는 29일 장례식장에서 화장되고 며칠간 임시 안치됐다가 내달 8일 비행기 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우리 정부의 공식 봉영 행사 이후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김 지사는 3·1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5월 상하이로 망명해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만 30세이던 1921년 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아내와 네 딸을 고향에 남겨두고 상하이로 망명했던 그가 조국을 떠난 지 꼭 100년 만에 귀국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한인이 독립운동 거점인 상하이로 몰려들던 시절 김 지사는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해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구국모험단 참모부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 폭탄 등 무기 구입, 일본 관청 파괴 및 일본 관리 암살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또 김 지사는 1921년 상해의 한인 자녀들의 교육 기관인 인성학교의 교장을 맡아 동포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나서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열정적인 애국 활동을 벌였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김 지사와 함께 만국공묘에 묻혔던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선생과 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윤현진·오영선 지사 등의 유해가 한국으로 옮겨졌지만 김 지사가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확인이 됐다.
후손들 역시 김 지사가 이곳 만국공묘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수년 전 우리 정부의 통보를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김 지사가 숨진 직후 당초 임시정부 청사에서 멀지 않은 상하이 중심의 징안쓰루(靜安寺路)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가 수차례 이장을 거쳐 만국공묘로 옮겨졌고, 묘비에 아무런 정보 없이 'TAI Y KIM'이라는 영어 이름만 적혀 있다 보니 확인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유족의 동의를 얻어 2015년부터 수년째 물밑에서 중국 정부를 꾸준히 설득한 끝에 마침내 김 지사의 유해를 봉환할 수 있게 됐다.
조관길씨는 "1975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김 지사의 셋째 딸)도 외조부님께서 묻혀 계신 곳이 상하이라고만 아셨지 어느 곳인지를 몰랐는데 5년 전 정부에서 외조부님 무덤을 찾았다고 연락이 와 고국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여기 와서 뵈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영삼 상하이 총영사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지사님의 유해를 오늘 드디어 고국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며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신 지사님의 마지막 귀국길에 동행해 매우 감개무량하게 생각하고 지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말했다.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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