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김현철 "13년만에 창작 재미 밀물…시티팝 정점 찍고파"
4월 학전블루 콘서트…5월 13년만의 10집 선공개
세련된 한국형 퓨전 재즈 추구…"음악은 애증, 콤플렉스가 창작 에너지원"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썰물이 길다고 바다가 땅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언젠가 밀물이 오기 마련이고, 그때가 되니 제대로 즐기는 것 같아요."
오랜 공백을 달의 인력으로 생기는 조수 간만에 견주니 단번에 공감이 된다. 하긴, 1993년 저물어가는 사랑을 '달의 몰락'에 비유하는 선명한 심상을 지녔던 그가 아닌가.
가수 겸 프로듀서 김현철(50)에게 창작 열의가 썰물처럼 쓸려간 것은 "음악이 새롭지 않다"고 느끼면서다. 그는 대학 강단에 서고 라디오 DJ를 하고, 기획사 FE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면서도 음악 활동은 쉼표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느낀 그는 곡 작업용 컴퓨터와 악기를 주위 동료들에게 주고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미술가, 소설가도 마찬가지겠지만, 하기 싫을 때는 다 내려놓고 떠나는 게…. 사람은 안 변하니까 다시 결핍을 느끼게 돼 있거든요."
강남구 논현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현철은 "다시 음악이 새롭고 재미있다"고 거듭 말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는 4월 9~10일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어게인(Again), 학전 콘서트' 일환으로 단독 공연을 열고 5월 초 10집 4곡을 선공개한다. 가을에 더블 앨범으로 나올 10집은 2006년 발표한 9집 '토크 어바웃 러브'(Talk about love) 이후 13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 "10집, 마지막 정규란 마음가짐으로 1집 때처럼 작업"
"일본 아마추어 DJ가 형 음악을 좋아한대." 일본에서 무역 회사를 하는 후배 전화 한 통이 새 앨범을 독려한 결정적 계기였다. 일본은 온천 몇 번 가본 게 전부였던 그로선 솔깃한 얘기였다.
"생각해보니, 제 음악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도망 다닌 걸 수도 있겠더라고요. 1집부터 떠올리니 다시 앨범을 내도 공감을 얻을지 모른다는 용기가 생겼죠."
6개월 뒤인 지난해 10월, 그는 5년간 진행한 MBC FM4U '오후의 발견' DJ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요즘 친구들이 쓰는 미디 프로그램부터 다시 배웠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다행히 제가 쓰려던 프로그램에 정통한 고수가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와서 쫓아다니면서 배웠어요. 너무 재미있었죠."
그즈음 1집이 2007년(17위)에 이어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12위에 선정되며 시티팝(City-pop)을 대표하는 음반으로 재조명된 점도 한몫했다. 솔 펑크와 퓨전 재즈 취향을 얼개로 한 1집은 당시 친숙한 가요 리듬이 아니었다. 세련된 사운드, 모던한 편곡, 한국적 감성의 밸런스는 지금 세대에도 파열음이 없는 수작이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든 1집이 나름 평가받는 걸 보고 '그때처럼 앨범을 만들자'고 생각했다"며 "10집까진 꼭 내고 싶었기에 마지막 정규 앨범이란 마음가짐으로 작업 중"이라고 말했다.
약관(弱冠)에 1집을 떼고 지천명(知天命)에 10집을 펴는 그가 잡념을 걷어내고 수렴한 음악 방향도 시티팝이다.
정작 그는 "사실 시티팝이 뭔지 몰랐다"며 "근래 미디어가 조명해 알았는데 처음엔 말장난인 줄 알았다"고 웃었다.
시티팝은 장르라기보다 1980년대 일본 버블 경제 시대에 꽃핀 도회적인 분위기 음악을 일컫는다. 2~3년 전부터 뉴트로 바람을 타고 복원되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의 노래 중 1집의 '오랜만에'와 '동네', 2집의 '그런대로', 4집의 '왜 그래' 등이 시티팝 계열로 리얼 악기에 신스 베이스, 드럼 머신을 가미해 세련된 풍미를 살렸다.
'오랜만에'는 지난해 9월 죠지가 20세기 한국 시티팝 재조명 프로젝트에서 재해석하기도 했다.
"신곡은 시티팝의 정점을 찍는 곡이 되길 바라요. 욕심이라면, 정성 들여 만든 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거죠."
18곡을 채울 더블 앨범에는 시티팝, 발라드, 왈츠 등 자작곡을 뼈대로 시인과촌장의 하덕규 노래도 담긴다. 3집까지 LP를 낸 그는 10집을 LP와 카세트테이프, CD로 모두 선보일 예정이다. 이후엔 싱글 등 형태를 달리하며 좀 더 자유롭게 창작할 생각이란다.
김현철은 "음악은 애증의 대상"이라며 "너무 사랑하는데 때론 날 안 보는 것 같았다. 남들 음악을 들으면 '난 왜 저렇게 못 해'라고 자책도 했다. 그런 콤플렉스가 창작의 큰 에너지원이었다"고 떠올렸다.
앨범 작업이 한창이라 아쉽게도 앞서 열릴 학전블루 공연에선 신곡을 미리 듣기 어렵다.
그가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은 어림잡아 10년 만이며, 학전 무대를 밟는 것도 처음이다. 이상민(드럼), 조삼희(기타), 이태윤(베이스), 조커(건반) 등 최정상급 연주자들이 밴드로 참여하며, 멀티 연주자 권병호와 가수 일레인이 게스트로 함께 한다.
"학전은 제게도 추억이 있어요. 낯선사람들과 김광석 형 공연을 보러 다녔고, (낯선사람들 출신) 이소라 씨를 처음 본 곳도 학전이죠. 이번엔 소극장의 아늑한 분위기에서 대표곡과 지난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 "사우디서 잡은 기타·드럼…고교 시절 퓨전 재즈에 빠져"
요즘 틴팝 세대에게 김현철은 MBC TV '복면가왕'의 식견 있는 연예인 패널쯤으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1980년대 후반 고(故) 유재하와 비견된 언더그라운드 '인싸'(insider를 뜻하는 신조어)였고, 1990년대 들어 X세대가 호응한 비범한 프로듀서였다. 장필순 '어느새', 이소라 '난 행복해'를 만든 작곡가이자 '그대 안의 블루',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등 영화 음악으로도 성취를 이뤘다.
"1집을 자작곡으로 채워 그렇지, 천재는 무슨 천재예요. 그땐 유재하 선배처럼 전곡을 작사·작곡한 앨범이 드물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는 데뷔 시절 천재 소리를 꽤 들었다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재수까지 하며 의대를 지원했던 그지만, 거슬러보니 음악인으로 예열된 순간과 만남의 연속이었다.
건설회사에 재직한 아버지를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는 현장 근로자들을 통해 기타와 드럼을 만났다. 그곳 생활을 청산한 아저씨가 주고 간 기타와 포크송 대백과로 기타 연주법을 익혔다. 가장 처음 연주한 곡은 홍민의 '석별'. 취미로 드럼을 연주하던 아저씨에게선 '쿵 짝꿍 쿵쿵' 리듬을 배웠다. 아저씨들이 낮에 일터로 나가면 드럼이 덩그러니 있는 방은 그의 놀이터였다.
"작곡한 첫 작품은 반가예요. 언북중학교 2학년 때 반가 작곡 대회에 대표로 나가면서 만들었죠. 하하."
고교 때는 조동진 음악에 빠져 포크에 심취했다. 어쿠스틱 기타에 폭신한 플루트 선율이 포개진 '아침향기'(1집 수록곡)가 그 시절 만든 노래다. 그를 퓨전 재즈 세계로 이끈 건 고3 형이 빌려준 카세트테이프였다. "테이프에 래리 칼턴, 밥 제임스 등의 음악이 빼곡했죠. 해외 음악을 풍부하게 듣는 환경이 아닐 때여서 누가 연주했는지도 모르고 심취했어요."
영향을 준 뮤지션은 퓨전 재즈 레이블 GRP 사운드의 정점인 데이브 그루신과 리 릿나워를 비롯해 래리 칼턴, 팻 매스니 등 꼽기도 어렵다. 왕성한 음악 섭취는 그의 견고한 재즈 화성, 브라스 등의 악기를 적소에 배치하는 품위 있는 사운드 디자인을 견인했다.
선망하던 프로 뮤지션들과 접점이 돼준 사람은 조동진의 동생인 조동익이다. 재수 시절, 김수철 공연을 보고 귀가하던 그는 그날 게스트이던 어떤날의 조동익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다. 김현철이 먼저 팬이라며 말을 걸었다. "신기한 게, 음악 얘기를 하다가 둘이 잠시 말이 없자 동익이 형이 '집 전화번호 드릴까요?' 하는 거예요. 이후 제가 전화하며 왕래가 생겼죠."
그때부터 꿈꿔온 음악인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조동익과 함께 간 강남구 역삼동 카페 '심플라이프'에는 들국화의 최성원과 허성욱, 시인과촌장의 하덕규 등이 모여들었다.
최성원의 제안으로 그는 홍익대 공대 1학년 시절 옴니버스 앨범 '우리 노래 전시회 3'(1988)에서 박학기 노래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를 작곡했다. 곡비를 받으러 동아기획에 갔다가 만난 김영 사장은 어느 날 지하 커피숍으로 그를 불러 "앨범을 내자"고 제안했다.
"집에선 음악 하는지 몰랐어요. 결정적으로 들킨 건, 김영 사장이 골프백에 담아준 거금의 계약금이었죠. 침대 밑에서 발견한 어머니가 제가 사고 친 줄 알고 '돌려주라'며 우셨어요. 당시 제가 유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설레는 보사노바 리듬의 '춘천가는 기차'(1집 타이틀곡) 가사를 보면 지금도 풋풋한 치기에 웃음이 난다고. "세상을 다 아는 스무살이고 싶었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다. '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자신에게 들어온 모든 개념을 "현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때"다.
'그'라고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 운전 중 뇌경색으로 교통사고를 당해 음악을 포기할 위기가 있었고, 공백 끝에 낸 2집(1992)은 리스너를 품지 못했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던 김영 사장은 포기하지 않고 3집을 제안했다. '달의 몰락'이 수록된 3집이 대중적인 흥행을 하자 전작들도 함께 팔려나갔다.
"3집이 끝나고 집이 한 채 생겼죠. 김건모, 솔리드가 있던 서인기획에서 4집(1995)을 낼 때는 밤새 술을 먹고 아침에 CD를 가득 실은 트럭이 유통사로 나가는 걸 지켜봤어요."
그는 '왜 그래'(4집·1995)와 '일생을',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5집·1996), '거짓말도 보여요'(6집·1998), '연애'(7집·1999) 등으로 주류 시장 지분을 넓혀갔다. 때론 신선함이 둔화했다는 평도 받았지만, 매 앨범 꼿꼿하게 자신의 뿌리인 재즈 감성을 살린 것은 고집스럽다.
아날로그 세대 향수인 라디오에 대한 의리도 일관성이 있다. 그는 1994년 '디스크쇼'를 시작으로, 2000년대에는 '뮤직플러스', '오후의 발견' DJ로 청취자를 만났다.
"라디오에 애정이 있어요. 순간의 포즈에 마음이 들키기도 하는 묘미가 있죠.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눈으로 보는 콘텐츠가 많아졌지만, 사실 집중하는 데는 귀가 가장 예민해요. 매일 규칙적이니 직장 같은 느낌도 들고요. 라디오는 또 할 겁니다."
윤종신 등 동료들보다 일찌감치 진입한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어느덧 15년가량이 됐다. 현재 FE엔터테인먼트에는 김갑수, 길용우, 이경진 등 중견 배우들이 주축으로 최근 산하에 음악 레이블 FE스토어를 설립했다. "사업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올해부턴 결제도 안 하려 한다"는 그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음악에 시간을 쏟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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