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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8) 광복군 투신 中엘리트 쑤징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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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8) 광복군 투신 中엘리트 쑤징허의 삶
101세 老항일전사 연합뉴스 기자 만나 "한반도 통일 이뤘으면" 당부
난징서 한인 청년들 만나 항일 의기 투합…한인 청년들과 광복군 근거지 시안까지 '1천㎞ 도보 대장정' 3번
"한국 도왔다" 문화대혁명 때 수난…뒤늦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본군 점령지인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에 수십명의 한인 청년들이 은밀히 모여들어 먼 길을 떠났다.
중국 내 유학생들과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한 이들로 구성된 한인 청년 무리가 향한 곳은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시안은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의 주력 부대인 2지대 주둔지였다. 청년들은 광복군의 초모(招募ㆍ군사모집) 공작에 호응해 항일전선에 나서고자 '도보 장정'에 나선 것이었다.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1천㎞가량 떨어진 시안까지의 길은 험난했다. 중국 내륙 곳곳을 장악한 일본군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탓에 난징에서 시안까지는 100일이 넘게 걸렸다.

이들 한인 청년 무리를 이끈 이는 광복군 지하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20대 중국인 청년 쑤징허(蘇景和)였다.
쑤와 한국인 청년 독립지사들의 인연은 당대 중국의 최고 명문 대학으로 손꼽히던 난징 중앙대학에서 시작됐다.
중앙대학 재학 시절 쑤는 이곳에서 유학하던 조일문(2016년 작고)과 만났다.

조일문은 당시 송지영, 이일범 등과 함께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학생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해 활동 중이었다.
청년 쑤징허와 조일문은 '항일로 나라를 되찾자'며 의기투합했다. 이후 쑤징허는 난징 내 일본군 동향 수집, 광복군 초모 활동, 광복군 입대 청년 호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1944년 초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펴던 임정 요원 김병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을 계기로 일본 경찰은 중앙대학의 한인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나섰다. 이 무렵부터 쑤징허는 본격적으로 한인 청년들을 시안으로 이동시키는 임무에 나섰다.
1944년을 전후해 그는 세 차례 한인 청년들을 시안의 광복군 부대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시안으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한인 청년들은 줄잡아 100여명.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공로를 인정해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은 광복 직후 그에게 '포상장'을 수여했다.
포상장에는 "우원(右員)은 대한민국 26년 이래로 3차례 동지 호송, 정보 전달 연락망 설치 등 중요 임무를 띠고 삼엄한 적의 경계망을 돌파하며 내왕에 100여일을 요하는 난징과 시안 간의 도보 연락을 취하여 그 임무를 완성하였음은 실로 감패(感佩·고맙게 느껴 잊지 못함)하여 마지않는 바다"라는 문구가 담겼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러 광복군 초모 활동의 전선에 나섰던 청년은 어느덧 101세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국 기자가 찾아왔다는 말에 쑤 할아버지는 가족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큰 목소리로 몇 마디 대화는 가능했지만 고령으로 기력이 크게 약해진 쑤 할아버지는 거동이 편치 않아 수년째 집밖에 제대로 나갈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이동시키느라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며 "특히 많은 인원의 숙식 문제가 가장 힘들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돌이켰다.
그는 또 "현재 한반도가 분열되어 있는데 같은 민족이고 같은 말을 쓰지 않나"라며 "분열된 한반도가 통일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한반도의 분단을 자기 조국의 일인냥 안타까워하는 그의 심경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더니 상념에 젖은 채 "조일문, 안춘생(안중근의 조카·광복군 2지대 1구대장)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어…"라고 읊조리듯 말했다.
그의 방 벽에는 이청천 장군에게서 받은 포상장이 걸려 있을 정도로 그는 청년 시절 자신이 걸어간 길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중국 최고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전도유망하던 청년이던 그가 타국의 독립운동을 도와 치러야 했던 대가는 컸다.
신중국 건립 직후인 1950년 그는 우리나라의 행정고시와 같은 간부 선발 시험에 합격해 화동지역 물자공급처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당시 적대 관계이던 '한국'을 도운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정치적 박해를 받고 온 가족이 안후이성 시골 농장으로 하방돼 생활하는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복직했지만 원래의 간부 직위로 대접받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다 퇴직했다.
이런 그에게 1992년 한중수교 직후 생사를 함께하던 옛 한국인 동지들과의 재회는 큰 기쁨이었다.
다시 만난 조일문 지사 등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쑤 할아버지는 우리 정부로부터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면서 다소간의 위로를 받았다.
현행 우리나라의 관련 법령상 외국 국적 독립유공자에게는 연금 등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진 않는다.
독립운동사 전문가들은 쑤 할아버지가 우리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외국인 독립운동 유공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그는 한중수교 직후인 1993년 과거 시안에서 만났던 광복군 구대장 출신 안춘생(2011년 작고) 전 광복회 회장이 보낸 편지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편지에는 옛 동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50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단절된 상태로 흘려보냈네요. 역경과 곤경을 헤쳐나갔던 지난 세월을 회상할 때마다 형님께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고생스럽게 난징과 시안을 오간 노고가 떠오르며 굉장히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이던 우리가 벌써 두발이 하얗게 센 노인이 되었고 주변에는 고인이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편지로는 저의 그리움을 다 담을 수 없네요."
ch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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