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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3)마루밑 계단 내려가면 탈출용 조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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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3)마루밑 계단 내려가면 탈출용 조각배
윤봉길 의거후 日 천문학적 현상금 내걸자 中 재력가 주푸청 자싱 난후湖에 은신처 제공
안네 프랑크 집 연상시키는 메이완자 76 주택…탈출 등 대비한 집 개조 흔적 곳곳에


(자싱[중국 저장성]=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린 비밀의 문, 사방을 살필 수 있게 동서남북으로 낸 창문, 마룻바닥의 탈출 구멍, 언제든 도피할 수 있게 집 뒤에 매어 놓은 조각배까지.
자싱(嘉興)시 중심의 풍광 좋은 호수인 난후(南湖) 변에 있는 청나라 말기 양식의 메이완자(梅灣街) 76호 주택. 이 집은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 가족이 숨어 살던 집을 떠올리게 했다.
1932년 중국 돈으로 60만 위안, 현재 한화 가치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현상금이 걸린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군경의 추격을 피해 숨어살았던 은신처다.
자싱 피신 시절은 김구 선생의 인생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때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로 일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상하이 점령 작전을 지휘한 일본군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크게 부상했다가 후유증으로 한 달 뒤 숨지는 등 다수의 일본군 지휘관과 고위 관리들이 죽거나 다쳤다.
일본은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 일대 한인들을 대거 검거하면서 '배후 색출'에 혈안이 됐다.
김구는 언론을 통해 윤 의사의 의거뿐만 아니라 그해 1월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 역시 자신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행동이라고 선언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 부닥친 김구 선생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중국인 지사 주푸청(<衣변에者>輔成·1873∼1948)이었다.
자싱 출신인 주푸청은 일본 유학 시절 쑨원(孫文·1866∼1925)이 세운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도 참여한 중국의 애국·항일 운동가로서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다.
일본군이 동북 지역에 이어 상하이까지 점령한 상태에서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김구를 돕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푸청은 자신은 물론 장남, 며느리, 수양아들 등 일가족을 총동원해 김구는 물론 이동녕, 김의한, 박찬익, 엄항섭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와 그 가족들까지 피신 생활을 하도록 했다.

일제의 최우선 검거 대상이 된 김구 선생은 1932년 5월 상하이를 탈출해 자싱에 도착, 주푸청의 수양아들인 천둥성(陳棟生)의 집이던 메이완자 76호 2층 다락방에 숨어 지냈다.
김구 선생의 은신을 위해 이 집은 특별히 개조됐다.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가리기 위해 나무로 된 비밀 문이 설치됐다.
호수를 바라보는 남쪽의 창문 말고도 나머지 방향에도 작은 구멍을 내 주변을 항상 살필 수 있게 했다.
또 다락방 마룻바닥에는 사람 한 명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네모난 구멍을 뚫어 뒀다. 평소엔 나무판자로 덮어 뒀다가 일본 군경이 닥칠 때는 비상 탈출용 사다리로 내려간 뒤 집 뒤편에 매어 놓은 조각배를 타고 탈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싱 시내에까지 일본 사복 경찰들이 활개 치며 김구 선생을 추적하자 주푸청은 장남 주펑짱(<衣변에者>鳳章)의 처가까지 동원한다.
자싱에서 남쪽으로 50㎞ 떨어진 난베이후(南北湖) 인근의 깊은 산중에는 며느리 주자루이(朱佳蘂) 친정의 피서용 별장이 있었는데 김구 선생에게 이를 새 피신처로 제공한 것이다.
김구 선생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자루이가 자신을 깊은 산중의 은신처로 안내해주는 모습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의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산 고개를 넘었다.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주푸청의 손자 주정위안(<衣변에者>政元·87)씨는 "한국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의 행동은 중국 인민의 항일정신을 일깨웠다"며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한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일본에 해를 당하지 않게 거리낌 없이 도우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당시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이던 김구 선생이 만일 일본에 체포됐다면 임시정부가 1945년 광복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계기로 다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 늘어나기 전까지 임시정부의 활동은 정부 기관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김구 선생은 일부 독립운동 진영의 임정 무용론을 끝까지 배격하고 항저우(杭州), 창사(長沙), 류저우(柳州), 충칭(重慶)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는 "임시정부의 활동 후반기에 접어들면 김구는 임정,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며 "그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임시정부가 사실상 지속해나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ch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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