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노위, 주요 노사단체 중심성 강화?…'도로 노사정위' 우려
토론보다 효율적 합의에 무게 둘 가능성…사회적 대화 정신에 배치
청년·여성·비정규직, 중소·중견기업 '들러리' 전락할 듯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일부 노동계 대표의 '보이콧'으로 의결 정족수를 못 채우자 의사결정 구조를 고치기로 했지만, 개편 방향을 두고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주요 노·사단체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 경우 경사노위 출범의 근본정신과 어긋날 수 있고 토론 자체에 가치를 두는 사회적 대화 정신이 퇴색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은 7일 경사노위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근로자위원인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 3명의 본위원회 불참에 대해 "위원회 의사결정 구조와 위원 위촉 등 운영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대안을 검토하고 마련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성현 위원장 "경사노위 의사결정 구조, 근본대책 세울 것"/ 연합뉴스 (Yonhapnews)
경사노위는 이날 문재인 대통령 참석하에 2차 본위원회를 열어 탄력근로제 개선 합의를 포함한 5개 안건을 최종 의결할 계획이었으나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가 막판에 불참 입장을 밝혀 의결 정족수를 못 채웠고 문 대통령의 참석도 취소됐다.
과거 노사정위원회를 포함해 최고 의결 기구인 본위원회가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사노위는 노사정위와 달리 주요 노·사단체뿐 아니라 청년, 여성, 비정규직, 소상공인, 중소·중견기업 대표도 참여하도록 했다.
사회 변화를 반영한 사회적 대화를 위해 다양한 계층으로 문호를 대폭 넓힌 것이다. 구성원이 다양해진 만큼, 합의를 도출하기는 더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상 본위원회는 노·사·정 위원 18명으로 구성되는데 재적 위원의 과반수가 출석하고 노·사·정 가운데 어느 한쪽 위원의 절반 이상이 출석해야 의결 정족수가 충족된다.
현재 본위원회 근로자위원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4명인데 이번에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가 집단 보이콧에 나서 의결 정족수를 못 채웠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왝 더 독'(Wag the Dog) 상황이 된 셈이다.
박태주 경사노위 상임위원은 기자회견에서 "사회적 대화의 핵심은 이른바 전국 차원의 노·사단체"라며 "이들이 중심이고 청년·여성·비정규직은 중요하지만 보조 축"이라고 강조했다. 주요 노·사단체의 의결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의사결정 구조를 고치겠다는 말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청년·여성·비정규직뿐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이 '들러리'로 전락해 경사노위는 '도로 노사정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도 주요 노·사단체의 특별한 지위를 보장하고 있다. 청년·여성·비정규직과 중소·중견기업 위원을 주요 노·사단체의 추천을 받아 위촉하도록 한 게 대표적이다.
이번 본위원회에 불참한 청년·여성·비정규직 위원 3명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협의해 추천했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본위원회를 앞두고 막판까지 이들을 직접 만나 설득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의사결정 구조가 주요 노·사단체의 중심성을 보장하고 있음에도 이번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게 문제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주요 노·사단체의 중심성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의사결정 구조를 고치면 다양한 계층 대표의 목소리가 무시될 위험이 커진다.
경사노위가 소수의 반대로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것을 막으려고 주요 노·사단체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사회적 대화의 정신과도 맞지 않을 수 있다.
박태주 상임위원은 경사노위가 '합의 기구'가 아니라 '협의 기구'라며 "협의를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쟁점을 정리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공론화를 거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반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수의 반대로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것을 막으려고 주요 노·사단체의 중심성을 강화한다면 과연 경사노위를 협의 기구로 볼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의사결정 구조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요 노·사단체의 주도하에 굵직굵직한 '성과'를 잇달아 도출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소외된 다양한 계층의 불만이 남는다면 바람직한 사회적 대화로 보기는 어렵다.
이번 사태는 진정한 사회적 대화를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점도 여실히 보여줬다.
경사노위 본위원회에 불참한 근로자위원 3명 가운데 청년·여성 대표 2명은 문성현 위원장의 설득으로 본위원회에 참석하기로 했다가 막판에 이를 번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사노위의 탄력근로제 합의에 반대하는 노동계 일부가 이들의 불참을 강하게 압박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노총은 이날 입장문에서 "취약계층 대표자들이 당초 참가 입장을 번복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겁박한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노동계에서는 경사노위에 불참하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탄력근로제 합의에 강하게 반대하는 기류가 남아 있다. 비타협적으로 사회적 대화에 반대하는 쪽에서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를 압박했을 수 있다.
문성현 위원장은 이날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에서 진행 중인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 논의를 둘러싼 논란에도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문 위원장은 노사관계 개선위의 사용자 추천 공익위원이 경영계 요구를 대폭 수용한 권고안 초안을 내놓은 데 대해 "단지 경영계가 추천 공익위원들을 통해 의견을 제출한 것일 뿐인데 마치 경사노위가 이를 받아들인 것처럼(왜곡하고 있다)"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런 부분에 대해 조직 내 많은 분과 토론하겠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이런 지점에 대해 대응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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