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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0)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 백범 김구
임정 경무국장이 첫 보직…밀정 감시·친일파 처단·요인 경호 담당
상하이 치안활동 참여로 프랑스 조계당국서 감사장 받아
안창호 조카딸 안맥결 서장 등 지금까지 밝혀진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33명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경무국장 김구'
1919년 3·1운동을 거쳐 그해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어 4개월 후인 8월12일, 백범 김구 선생은 임정에서 이런 보직을 받는다. 내무부 산하 경무국을 총지휘하는 초대 경무국장이었다. 경무국장은 오늘날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국권을 빼앗기고 타국 땅에서 더부살이하는 임시정부 소속 경찰이긴 했으나 명목뿐인 경찰은 아니었다. 임정 경찰은 정부를 지키고 현지 한인사회 안전을 수호하는 활동을 맡았으며, 각종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한 독립투사들을 다수 배출한 요람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과 경찰의 인연은 임정에 그치지 않는다. 광복군 등 항일 무장투쟁 조직에서 활동하며 옥고를 치른 뒤 해방된 조국에서 경찰에 투신해 국민 안전을 지킨 이도 적지 않다.

◇ 독립운동 한 축이던 임정경찰…일제 밀정 감시하고 친일파 처단


1919년 4월25일 임정의 조직체계를 담아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정'에 내무부 산하조직으로 경무국 설치가 규정되면서 임정 경찰조직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주권 피탈로 타국에서 정부를 세웠다는 특수한 상황은 임정 경찰의 기능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범 김구는 저서 '백범일지'에 임정 경찰의 역할을 이렇게 기록했다.
"남의 조계지(외국인이 머물며 치외법권을 행사한 지역)에 붙어사는 임시정부이니만치, 경무국 사무는 현재 세계 각국의 보통 경찰행정과는 달랐다.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해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경무국은 공공 질서유지와 범죄 예방에 해당하는 '행정경찰 사무', 일제 밀정 탐지 등 오늘날의 정보·보안·외사기능에 해당하는 '고등경찰 사무', 일제에 이로운 서적 등을 검열하고 처리하는 '도서출판 및 저작권에 관한 사무', 전염병 예방과 호구조사·출입통제 등을 통해 외부의 위해를 차단하는 '일체 위생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임정 요인 경호와 청사 경비 등도 경무국의 주된 업무영역이었다.
임정 경찰 관련 연구용역을 담당한 한국근현대사학회는 임정 경찰이 이같은 사무를 담당한 사실을 두고 "일반적 범죄 예방뿐 아니라 거주민 관리 등 국가 운영을 위한 총체적 역할을 했음을 볼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식민통치에 맞서 투쟁하며 국권 회복을 꾀한 임정의 목표의식은 당시 경찰 조직과 활동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임정 경찰은 1919∼1921년 '연통제'라는 비밀 지방조직을 운영했다. 연통제 하부조직인 경무사와 경무과는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연락·선전을 담당했으며, 각종 기밀 관련 업무와 조사, 요인 경호 등 업무를 수행했다. 1923∼1936년에는 상하이 거류민 기구인 교민단 산하에 의경대가 설치돼 동포사회의 자치와 안전을 지키고, 일제 밀정이나 친일파 감시·처단 임무를 맡았다.
당시 임정 경찰에서 근무한 이들은 이후 국내외에서 일제 요인이나 친일파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에 가담하며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


1926년 식민 수탈의 본산이었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다가 불발되자 일경들과 총격전 끝에 자결한 나석주는 앞서 경무국 경호원과 의경대원으로 활동했다. 의경대원이던 유상균은 1932년 다롄에서 일본 관동군 사령관과 만주철도 총재 폭살 계획을 추진하다 체포돼 옥살이하던 중 광복 하루 전인 1945년 8월14일 옥중에서 살해당했다.
임정 경찰 출신 중 김구를 비롯한 67명에게는 광복 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 명목뿐인 조직 넘어 실질적 활동…프랑스 당국에도 존재감 과시
임정 경찰은 상하이 현지 치안유지 활동에까지 참여하며 타국에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19세기 중국에 진출한 서구 열강은 상하이에서 각자 조계지를 확보해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대한민국 임정은 프랑스 조계지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1925년 초 프랑스 조계지 외곽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프랑스 조계당국은 치안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현지 교민단은 의경대원 19명을 프랑스 조계당국에 파견했고, 당국은 이들을 무장시켜 조계지 외곽 치안유지 활동에 투입했다. 조계당국은 이후 교민단장 여운형에게 감사장을 보내 의경대원들의 활동에 감사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근현대사학회는 "이는 의경대가 자체 치안유지뿐 아니라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사는 프랑스 조계에서 당국에 협조해 치안 불안을 극복하는 데 일조한 사례"라며 "의경대로서도 조계당국에 협조하는 것이 임정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조계 내 활동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 독립운동가들, 해방 조국서 경찰에 투신하기도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 경찰에 부역했던 이들 중 적잖은 수가 해방 후에도 경찰에 몸담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해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다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해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킨 이들도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 위기에서 구한 문형순 전 제주 성산포경찰서장이 대표적 인물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문 전 서장은 광복 후 경찰에 입문해 주로 제주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제주 4·3사건 당시 모슬포에서 좌익 혐의를 받는 주민 100여명을 자수시킨 뒤 방면해 학살을 피하도록 도왔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8월에는 제주에서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계엄군 명령을 거부해 200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전을생 경사는 중국에서 일본군 헌병대 통역으로 복무하던 1943년 상사에게 중국군 인원을 축소 보고하고, 군사기밀인 공격 계획을 당시 중국군 소속 친형에게 넘겼다. 그 결과 일본군은 350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며 전투에서 대패했다.
해방 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한 전 경사는 종로 등 서울시내 일선 경찰서와 파출소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경찰관들이 선호하던 정보계나 사찰계 등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며 파출소나 형사 등 민생치안 부서만 주로 돌다 퇴직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조카딸 안맥결 총경도 해방된 조국에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간 사례 중 하나다. 안 총경은 1919년 평양 3·1 운동과 숭의여학교 10·1 만세운동, 임정 군자금 모금 등 활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차례 투옥됐다.
해방 후 여성경찰간부 1기로 경찰에 투신해 제3대 서울여자경찰서장 등을 역임한 그는 도산 조카딸이라는 이유로 경무대(청와대) 발령을 받자 '부당한 인사'라며 거부했다가 문책성 전보를 당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는 군사정권에 합류하라는 권유를 거부하고 사표를 내는 등 강직함을 보인 경찰관으로 전해진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을 발굴 중인 경찰청은 지금까지 이같은 사례에 해당하는 33명의 발자취를 찾아냈다.
puls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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