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외교관이 본 3.1 운동…"곳곳서 만세시위 불길처럼 타올라"
당시 주한 러 총영사 보고서…"9천명 헌병, 3천명 경찰, 2개사단 병력도 부족"
"일제, 고문과 가장 비열한 모욕적 수단 사용…대나무 몽둥이로 정신 잃을 때까지 때리기도"
"중립적이던 서울 주재 외국 단체들도 일제 잔인함에 항의…제암리 학살 사건 분노 일으켜"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정확히 오후 2시. 서울 전역과 다른 많은 도시, 마을들에서 조선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서울의 한 공원에는 순식간에 4천 명에 가까운 군중이 운집했다.…비슷한 시위는 같은 날 조선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일어났으며 체포와 폭력으로 이어졌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국내외 언론뿐 아니라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 공관의 보고를 통해서도 세계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가 일본 도쿄에 있는 자국 대사에게 보낸 3.1운동 관련 보고 전문을 통해 확인됐다.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 프랑스, 영국 외교공관들도 각자 본국에 3.1운동 관련 보고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가 '러시아 연방 국립 고문서보관소'에서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 총영사 야코프 류트쉬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 서울 주재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의 면담을 통해 얻은 정보, 한국이나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 내용 등을 정리한 3.1 운동 관련 상황을 도쿄에 있던 바실리 크루펜스키 대사에게 보고했다.
1911년 제정 러시아의 서울 주재 총영사로 부임한 류트쉬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뒤 혁명 정권에 복무하길 거부하고 1921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그는 역시 소비에트 정권에 반대하며 시베리아 옴스크에 진을 친 알렉산드르 콜착 제독이 이끄는 반혁명 임시 정부 외무부의 지시를 받고 있던 크루펜스키 대사에게 전문을 보낸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콜착 정부는 외국 간섭군의 일원으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혁명 세력 진압을 지원하던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선의 독립운동에 지극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본국 정부의 방침을 충실히 따르던 류트쉬 총영사는 1919년 3월과 6월 사이 여러 차례에 걸친 보고에서 3월 1일~5월 31일까지의 만세 시위 및 진압, 관련자 검거 상황 등을 상세히 전하면서 시위대와 일본 진압 병력과의 무력 충돌, 시위대의 일본 관공서·헌병대 공격, 일제의 잔혹한 시위대 진압 사실 등을 소개했다.
그는 객관적 목격자의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일제의 잔혹한 만세운동 탄압을 비난하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는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표시했다.
류트쉬는 1919년 3월 31일 자 보고에서 3월 1일~20일까지의 전국적 만세시위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초대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백작의 철권으로 조용해졌던 조선인들의 민족 운동이 그의 정책을 이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제2대 총독) 원수 통치기에 전 세계를 휩쓴 민족자결주의 흐름을 타고 서울은 물론 조선의 벽촌에서도 일본 압제에 항거하는 시위를 통해 환한 불길처럼 타올랐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대규모 경찰, 헌병, 한반도에 주둔한 2개 사단 규모의 군사력도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 함성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지적했다.
보고에 따르면 3월 1일 서울, 평양, 진남포, 함흥, 원산, 선천, 의주, 안주 등에서 일제히 발생한 만세시위는 2일과 3일 고종 장례식(3일) 때문에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4일부터 재개됐다
보고서는 "4일 선천(평안북도)에서 시위대와 경찰 충돌로 30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부상했다. 300명 이상이 체포됐다"고 전했으며 "14일 명천(함경북도)에선 5천명의 시위대가 헌병 초소를 공격했고, (퇴치 과정에서) 무력이 사용돼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3월 20일에는 목포 인근의 무안에서 약 150명이 시위를 했고 주동자들이 체포됐다. 목포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함경남도 리원에서는 군중들이 헌병 초소를 공격했으며 격퇴 과정에서 시위대 1명이 살해됐다"고 적었다.
보고서는 "평화적 시위와 독립청원서 전달로 표현된 소요가 주동자 체포와 석방 거부 이후 헌병대와 경찰에 대한 노골적 분노로 번졌고,…결국엔 불가피하게 유혈 충돌과 희생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류트쉬는 3월 21일부터 5월 31일까지의 시위 및 진압, 관련자 검거 상황 등은 같은 해 6월 1일 자 전문에서 보고했다.
보고서는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500명 이상의 조선인이 경찰서를 공격했고 소총 사격으로 해산됐다"면서 시위는 4월 말까지 이어졌으며 5월 들어서도 소요 분위기가 완전히 진정되진 않았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5월 25일 시위 참여로 체포돼 서울 감옥에 투옥돼 있던 3천명 이상이 '만세'를 외쳤고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으며 "5월 31일엔 서울 중심가에서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서 들어와 선전·선동 활동을 벌이던 6명의 조선인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류트쉬 총영사는 특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지나치게 가혹했던 시위 진압 상황도 보고했다.
그는 6월 1일 자 보고에서 "이 조치들(시위 진압 조치들)은 상황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잔인함으로 모든 외부 관찰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고 적었다.
이어 만세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3월 30일에서 4월 5일 사이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17만3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전하면서 "한반도에 배치됐던 9천 명의 헌병과 3천 명의 경찰, 2개 사단 규모 부대들로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크게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4월 중순 이후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일본 본토에서 6개 대대 규모의 지원 부대와 400명의 헌병이 추가로 배치됐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소요 진압은 고문과 가장 비열한 모욕을 수반했으며 때론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면서 "곳곳에서 힘없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들의 믿을 수 없이 잔인한 행동에 대한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확인됐다"고 썼다.
이어 "서울의 미국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의 전언에 따르면 병원이 4월 초 이미 부상한 조선인들로 꽉찼다"면서 "조선의 외국 단체들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들도 현실을 보면서 힘없는 주민들에 대한 (일제의) 잔인함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소개했다.
류트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보여주는 사례로 서울 주재 미국 영사가 자신에게 제공한 소요 진압 실태 보고서 내용을 인용했다.
미국 영사는 일본 경찰에 20일 동안 체포됐다가 풀려난 한 미국 학교 학생의 상태를 전하면서 "내가(미국 영사가) 석방된 그를 찾아갔을 때 그의 어깨와 팔, 가죽끈으로 묶였던 곳에는 깊은 붉은 상처 자국이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일제 경찰은) 숨이 멎을 정도로 그의 가슴을 가죽끈으로 졸랐다"면서 또 "그는 살이 떨어져 나오지 않고 피가 흐르지 않도록 종이로 감싼 대나무 몽둥이로 어깨와 팔을 맞아 의식을 잃었다"고 가혹한 고문 실상을 고발했다.
류트쉬 보고서는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도 증언하면서 "이 사건에서 적용된 소요 진압 방식은 특별히 일제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위에 언급한 곳(수원 제암리)에 군인들이 나타나 모든 조선인 기독교도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했다. 사람들이 교회에 차자 군인들은 군중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뒤이어 군도와 총검으로 교인들을 공격했다. 사망자는 30명에 이르렀고 교회는 불태워졌다"고 참상을 전했다.
미국 부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15곳의 다른 장소도 유사한 방법으로 파괴됐다고 류트쉬는 덧붙였다.
류트쉬 총영사의 보고서 내용은 러시아에선 역사학자 보리스 박의 저서 '러시아 외교관의 눈을 통해 본 1919년 조선에서의 3.1운동'(1998년)을 통해 소개된 바 있으나 국내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러시아 총영사의 3.1운동 보고서 내용을 국내 연구자들이 일부 소개했으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없다"면서 "보고서 내용이 상세하게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cjyou@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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