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옛 수용소 옆 징용피해자 유골 찾기…국적 넘은 구슬땀
日 오키나와 기노자손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유골 발굴 현장
한국·일본·오키나와·총련계 재외동포·대만인 모여 유골 수색
미군의 민간인 수용소 사망자 묻혀…위안부 피해자 매장 가능성도
(기노자손 [일본 오키나와]=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마 이마 쪽 뼈일 겁니다. 여기서는 후두부 쪽 뼈도 발견됐습니다."
일본 남단의 천혜의 섬 오키나와에서도 고급 리조트가 즐비한 기노자손(宜野座村). 바닷가 옆 언덕의 수풀 속에서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5) 씨는 엄지손가락 두 개 크기의 뼛조각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구시켄 씨는 35년째 유골 발굴과 수습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대표다. 가마후야는 땅굴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오키나와 방언이다.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인 이곳에서 그가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틈나는 대로 작업을 진행했고 소식을 들은 오키나와 현지의 자원봉사자들이 도왔다. 그리고 수용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조금씩 발견되기 시작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 중 세워진 이 수용소에서는 말라리아 등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자가 쏟아졌다. 미군은 이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수용소 주변에 집단으로 매장했다.
15일 구시켄 씨가 4년째 헌신하고 있는 유골 발굴지에서 기자는 삽을 들고 함께 유골을 찾아나섰다.
작업은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을 찾는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을 개최 중인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시민들 30여명도 함께 했다.
한국에서는 주로 풍광이 아름다운 인기 관광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기 수많은 사람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생각하고 공격을 퍼부었고, 일제는 힘에 부치자 오키나와 주민들과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 조선인 노동자와 군인·군속(군무원)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잃은 일본인은 20만명을 훌쩍 넘는다.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조선인만 1만명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들도 적지 않게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키나와의 남의 나라 전쟁에서 억울하게 숨졌지만, 유골이 돼 수습되지 못한 채 어딘가에 묻혀있다.
오키나와는 따뜻한 기후 탓에 나무와 풀이 금방 무성하게 자란다. 그만큼 유골 발굴 작업이 힘든 곳이다. 70여년 전 유골이 묻혔던 곳은 울창한 숲이 됐고, 이곳에서 유골을 찾는 것은 매장지를 덮은 질긴 나무뿌리와 씨름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이날 구시켄씨, 동아시아 공동워크숍 참가자들과 함께 발굴 작업을 한 곳은 명부가 발견되지 않아 누가 묻혔는지, 조선인이 묻혀있는지 확인되지 않은 곳이다. 민간인 수용소인 만큼 당시 민간인으로 분류됐던 한반도 출신 위안부가 묻혀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구시켄 씨는 "위안부들은 당시 민간인 수용소에 수용됐으니,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골이 위안부의 것일 가능성은 열려있다"며 "오키나와에는 강제동원 조선인이 묻혔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서울이나 도쿄와 달리 이미 봄 날씨로, 벚꽃도 핀 이곳의 이날 낮 최고기온은 23도. 혹시나 유골이, 그것도 위안부 피해자의 유골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삽질을 계속하는 사이 흐르는 땀이 금새 셔츠를 적셨다.
유골 발굴에서 신경을 써야 할 것은 흙의 색깔이다. 70여년이 지난 과거라도 하더라도 시신을 매장했던 곳은 흙의 색깔이 주변과 다르기 때문이다.
작업은 유골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짚어낸 뒤 퇴적이 됐을 법한 흙을 삽으로 파낸 다음, 흙을 얇게 긁어내면서 색깔이 다른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날 발굴작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30여명으로, 각기 다른 배경을 가졌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와 학자들, 오키나와 시민들,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계 재일동포들, 대만에서 온 학생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다.
함께 삽질을 하던 오키나와 주민 도미무라 씨는 "전부터 '가마후야'의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시간을 내 발굴 현장에 왔다"고 말했고, 지역 류큐대 교육학부 여학생인 이시카와 씨는 "유골을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일에 관심을 갖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굴을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통은 구시켄 씨 등 가마후야 회원 3~4명이 하던 발굴작업은 이날 워크숍 참가자 등의 도움으로 속도가 붙었지만, 새로운 유골이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의 발굴 현장은 유골 문제의 해결을 통해 과거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려는 동아시아의 다양한 시민들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 유골 찾기에 나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워크숍을 주최한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의 도노히라 마코토 씨는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유골발굴을 함께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고, 평화디딤돌의 정병호 대표(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유골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젊은 세대로 넓어지고 다양한 젊은이들이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평화를 모색하는 자리여서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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