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⑤달구벌 90계단을 아세요
소나무 울창했던 비밀통로…일제 감시 피한 만세운동 집결지
이상화 고택, 애덤스관…3·1운동 흔적 '생생'
2008년부터 골목투어 관광상품 인기…"역사적으로 뜻깊은 장소"
(대구=연합뉴스) 최수호 기자 = "3월 1일 서울에서 거사가 있을 겁니다. 대구도 준비해야 합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저항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대구에서도 7일 뒤인 3월 8일 시민들의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시내 전역을 뒤덮었다.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대구 출신 이갑성과 이만집 목사, 김태련 조사(선교사를 돕는 직책) 등 지역 기독교 지도자, 계성학교 백남채·김영서 교사, 신명여학교 이재인 교사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장날에 맞춰 준비한 만세 시위에는 학생과 시민 등 1천여명이 참여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총칼과 곤봉을 들고 저지에 나섰다. 만세 행렬이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부근에 이르렀을 때는 건물 옥상에서 기관총으로 시민을 겨누기도 했다.
그러나 태극기를 세차게 흔들며 지금의 약전골목, 대구백화점 등으로 이동하는 만세운동 행렬에 동참하는 시민은 점점 더 늘어났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드높아졌다.
만세운동은 10일에도 이어졌다. 교사와 학생, 시민 등 200여명이 대한독립을 부르짖었다.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등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대거 참여해 '학생 의거'라고도 불린다.
대구 만세운동 영향으로 경북 전역에서도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
100년 전 일제에 저항해 대구 전역에 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던 그 날의 역사는 도심에 있는 '3·1 만세운동길'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중구 제일교회 담 옆에는 90개 계단과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있다. 1919년 3월 8일 분연히 일어났던 '대구 3·1운동'에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던 계성학교 학생 등이 집결지인 서문 큰 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길이다.
당시 이 길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해 학생 등 참가자들이 일본 경찰 감시를 피해 집결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비밀통로 역할을 했던 이 길은 현재 3·1 만세운동길로 부르고 있다.
90개 계단 주변 담에는 1900년대 초 대구 시내와 3·1운동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3·1 만세운동길에서 계산성당 방향으로 큰길을 건너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저항시인 이상화 고택이 나온다.
이상화 시인이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39년부터 1943년 숙환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무른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마당 등이 보존돼 있다.
고택이 지금까지 보존돼 온 것은 시민들의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2001년 11월 도로계획에 따라 이곳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2002년 1월부터 보존을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군인공제회에서 인근에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2005년 6월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시는 고택을 수리한 뒤 2008년 8월 시민에게 개방했다.
현재 이곳은 대구 문인 등이 중심이 된 이상화 기념사업회가 위탁관리 하고 있다.
이밖에 도심인 중구에는 대구 3·1운동 당시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던 계성학교 애덤스관이 있다.
이 건물은 대구 최초 선교사인 애덤스(Adams)가 미국 선교부로부터 건축비를 지원받아 1908년 건립했다.
중구는 2008년부터 3·1 만세운동길과 이상화 고택 등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는 도심 속 장소를 관광상품으로 묶은 '대구 중구 골목 투어'를 선보이고 있다.
첫해 방문객은 287명에 불과했지만, 작년에는 222만1천500여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구 관계자는 "도심 골목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입혀 관광상품으로 만들었다"며 "시민과 관광객이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고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장소"라고 말했다.
su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