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필사의 탈옥 '인천 감리서'…'역사 거리'로 조성한다
인천 중구, 백범 발자취 따라 '김구 역사 거리' 조성ㆍ학술 용역 발주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1898년 3월 안개가 자욱한 봄날 밤이었다.
관청인 인천 감리서의 감옥 바깥이 어수선했다. 죄수 5명이 줄사다리로 옥담을 뛰어넘어 달아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탈출한 22살 청년의 얼굴은 앳되나 굳셌다.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황해도 치하포 한 주막에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죄로 들어간 감옥이었다.
'만약 나를 무한정하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옥에서 죽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자신이 죽으면 왜구만 즐거울 터, 심사숙고 끝에 탈옥을 결행한 그였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캄캄한 밤이었다. 밤새 바닷가 모래밭을 헤맸지만 막상 동이 터 보니 감리서 바로 뒤인 용동 마루턱이었다.
청년은 뾰족한 천주교당 지붕(현 답동성당)을 보며 서울이 있을 동쪽으로 향했다. 길을 잘 아는 맨 상투 바람의 품일꾼에게 안내를 부탁해 화개동 마루턱까지 걸었다.
수색 중인 순사들을 피해 한참을 소나무 밑에 숨었다가 걸으니 겨우 인천항 5리 밖이었다. 황혼이 되도록 물 한 모금 못 먹어 눈 앞이 핑핑 돌았다.
벼리고개와 부평을 지나 겨우겨우 양화진 나루(현 마포구 합정동)에 당도했다. 근처 서당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뒤에야 양화도를 건너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는 훗날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백범 김구 선생이 '백범 일지'에서 쓴 탈옥기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내용이다.
필사의 탈옥을 감행한 김구 선생이 청년 시절 옥살이한 인천 감리서는 지금 터만 남았다. 그 앞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인천시 중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에 남긴 발자취를 기억한다는 취지에서 인천 감리서 터를 중심으로 '김구 역사 거리'를 조성하기로 했다.
감리서가 있던 중구 내동 83번지를 중심으로 150∼180m 구간에 벽화와 조형물을 꾸미고 표지판을 정비한다.
사업비 총 2억5천만원을 들여 역사문화 콘텐츠 학술 용역도 발주했다. 김구 선생이 감리서를 탈출한 경로와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가 묵으며 아들을 옥바라지하던 객줏집의 정확한 위치도 이 용역에서 찾아낼 계획이다.
곽 여사는 감리서 삼문 밖 개성 사람인 '박영문'의 객줏집에서 일하며 김구 선생의 옥바라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구 선생은 어머니가 밥 짓고 바느질을 하며 하루 세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 주는 조건으로 고용됐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중구는 김구 선생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장소를 용역을 통해 발굴한 뒤 하나의 도보 코스로 엮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중구 관계자는 "김구 선생이 두 번째로 인천에서 투옥 생활을 할 때 인천항 축항 공사에도 동원됐는데 이러한 사실도 도보 코스 조성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은 1919년 현재 경찰청장과 같은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냈으며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창단해 의열활동을 지휘했다. 이후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오르며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2차례 인천에서 투옥 생활을 한 그는 광복 후 귀국해 지방을 순회할 당시 인천을 가장 먼저 찾아 "내 인생에 있어서 남다른 곳이다"라고 말했다.
cham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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