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선언과 3·1운동의 교량' 김마리아 '2월의 독립운동가'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마리아(1892.6~1944.3)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 유학중이던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유학생들과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계획이 '2·8 독립선언'으로 이어졌고, 선생도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닥나무 껍질로 만든 얇은 종이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춰 부산에 도착했다. 교육·기독교·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도쿄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2·8독립선언이 만든 독립운동의 불씨를 거국적 3·1운동으로 연결하는데 공헌한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으며,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됐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됐다.
선생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며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선임됐다. 이후 중국 난징대학에 입학해 일본에서 못다 한 공부를 계속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돼 활약하기도 했다.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유학하면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선생은 1928년 2월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2년 7월 귀국,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에 의한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병원 치료 도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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