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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칼럼] 미투 1년, 문제는 '성인지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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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칼럼] 미투 1년, 문제는 '성인지 감수성'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논설위원 = 지난해 4월 12일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낯선 단어를 내놓았다. 그날 대법원은 모 대학교수 해임소송을 파기환송 했다. 여학생들을 뒤에서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등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교수의 복직을 결정한 2심이 잘못됐다는 취지였다. 대법원은 6개월 후인 10월 말 친구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남성에 대한 상고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두 사건 모두 '성인지 감수성 결여'가 원심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性認知 感受性)이라는 용어는 십여 년 전부터 국내에서 사용됐다. 국제적으로는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대회에서 사용된 이후 통용됐다. 국내외의 풀이를 종합하면 성인지 감수성은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민감성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남자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비하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섬세하게 가려내는 것을 뜻한다.

2017년 대선 경선 후보 토론회 내용을 다루면서 '성인지'를 '성인잡지'로 잘못 풀어썼다가 이튿날 '바로잡습니다'를 내보낸 언론도 있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조차 몰라도 되는 현실을 꼬집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용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인지 감수성은 대법원판결로 환기됐을 뿐이다. 사회학이나 여성학을 거론하지 않아도 당연한 인권의식이며,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갖추고 있는 상식적인 감수성이라고 믿는다. 다만, 이 감수성을 말과 행동에 녹여낼 때 시차와 단절이 있는 듯하다. 성범죄 사건을 언급할 때 피해자 이름을 무심코 앞세우는 게 단적인 사례다.



서지현 검사가 지난해 1월 29일 검찰 내부통신망에 성희롱 피해 사실을 올리면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새해 들어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가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했다. 빙상계에서 다른 피해사례가 이어졌고, 유도·태권도에서도 폭로가 나왔다.

서 검사의 미투는 평창동계올림픽 D-10을 맞아 온 나라가 들썩이던 때 이뤄졌다. 되짚어보면 서 검사가 글을 올리기 열흘 전, '효자종목'인 쇼트트랙 여자대표팀의 주장이던 피해자는 선수촌을 이탈했다가 복귀했다. 당시 코치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만 밝혔으나, 그의 고소내용으로 볼 때 더 큰 고통을 혼자 추스른 후 돌아온 것이었다.

정부와 대한체육회가 초기 대책을 내놓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약했다. 가해자를 영구제명하거나 국외 활동을 막는 것은 사후약방문이다. 전수 조사를 하거나 신고센터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나 주변인이 적극적으로 신고할 것이라는 기대는 2차 피해를 우려하는 성폭력 사건의 핵심을 놓친 관료적 탁상공론이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대대적인 스포츠 인권 실태조사에 나선다지만 얼마나 성과를 낼지 미지수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라" "다른 피해자도 용기 있게 나서라"는 말은 공허하다. 빙상계에서 영향력이 큰 지도자의 지난 21일 기자회견이 이를 잘 보여줬다. 그는 성폭행 피해를 몰랐고, 은폐하려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피해사례를 추가 공개한 젊은 빙상인들을 향해 "진정으로 빙상 발전을 위해서 하는 건지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엘리트 체육을 손보지 않으면 체육계 성폭력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엘리트 체육이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지만, 시대에 맞지 않게 됐다. 어린 선수가 또래와 단절된 채 대표팀 선발과 상급학교 진학까지 지도자의 권력에 매달리고 줄을 서게 되는 시스템은 폐기할 때가 됐다. 남자 지도자의 방을 여자 선수가 청소까지 하는 체육계의 합숙, 성적(性的) 수치심까지 참아내도록 하는 훈련이 말이 되나. 이런 관행은 일반적인 성인지 감수성으로는 용납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체육계 피해자들이 어떤 답을 얻을지 걱정된다. 피해자 주장에만 의존해 무죄 추정의 원칙을 버리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법과 증거로 판단하되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수사와 재판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해 미투가 이어졌지만, 많은 피해자가 더 큰 고통과 좌절을 겪었다. 미투 운동 2년 차인 올해는 "나는 걸리지 않을 것" "결국 너만 손해야"라며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들이 대가를 치르는 사례가 많아져야 한다.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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