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 음파무기 공격음모' 아바나 미스터리의 교훈
"과학적이고 정상적인 설명보다 흥미와 정치적 계산속 음모론이 득세"
"이라크 침공 때 미국민을 기만한 후세인 음모론과 닮은 꼴"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최첨단 기술 무기의 본산인 미국조차 만들지 못하고 존재도 몰랐던 비밀스러운 음파 무기를 이용해 미국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공격했다는 제임스 본드 영화 같은 쿠바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 미스터리의 결말은 싱거웠다.
음파 무기나 고농축 에너지가 실린 마이크로파(뉴욕타임스 보도)를 이용한 무기가 아니라 짝짓기철 암컷을 애타게 부르는 수컷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였다는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이달 초 나온 것이다.
갖가지 상상 속의 음파 무기를 동원해 쿠바 정부나 또는 '배후'인 러시아(NBC 보도)의 공격 음모 의혹을 제기했던 미국 언론들은 알고 보니 귀뚜라미 울음 소리였다는 연구 발표를 전하는 것으로 소동을 마무리했다.
돌고래에 기뢰 탐지 훈련을 시키듯, 귀뚜라미들에 음파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신기술을 쿠바나 러시아가 개발했을 수 있다는 식의 추가 `의혹' 제기는 아직 없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미국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 수십명에게 현기증, 귀통증, 이명,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을 일으킨 것은 정신의학적 용어로 `전환 장애(conversion disorder)' 혹은 `집단 심인성 질환'으로 설명된다. 심리적 전염이라는 뜻이다.
미국 잡지 배너티페어 2월호는 '아바나 미스터리'의 전말을 되짚어 보면서 이를 전환 장애, 쉬운 말로 `집단 히스테리'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인 2015년 미국과 쿠바가 50여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함에 따라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들도 아바나 주재 대사관에 복귀했다.
발단은 2016년 하반기 CIA 요원 2명의 대화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겐 아직 신체적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개월 후 다른 한 요원이 "강력한 고음파"로 인해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됐다고 보고한 게 다른 외교관과 직원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고, 처음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 CIA 요원이 사람들에게 비슷한 증상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권했다.
이 요원의 건의에 따라 대사가 대책 회의를 소집했고, 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후 수개월에 걸쳐 대사관 직원과 가족 가운데 80여명이 현기증, 귀 먹먹함, 기억상실증, 혼수상태, 두통, 시야 훼손 등을 호소했다.
자신의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신고한 첫 사례자 4명은 모두 CIA 비밀 요원이었으나 점차 다른 사람들도 집이나 아바나 시내 호텔에서 잠시 머물 때 이상한 소리에 고통을 받았다고 신고했다.
이상한 소리로 인한 증상 첫 사례 보고 며칠 만에 마르코 루비오(공화) 상원의원을 비롯해 미국 관리들이 극비 음파 무기를 거론했다.
미국 정부는 원인 파악에 필요한 정보를 개인 정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은 것도 사태 확산에 일조했다.
아바나 주재 캐나다 대사관 직원들 사이에서도 미국 CIA 요원 이웃집에 살던 사람을 포함해 몇 사람에게서 유사 증세가 나타났다.
캐나다는 쿠바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쿠바 정부의 공격 대상이 될 까닭이 없는 만큼, 이상한 소리가 공격용 음파 무기라는 가설에 맞지 않는 사례였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주중 미 대사관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한건 보고됐다. 그러나 쿠바 정부와 중국 정부가 공모해 같은 극비 음파 무기로 미국 외교관을 공격한 것이라는 음모론은 구성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이 사례도 곧 잊혔다.
배너티페어는 중세 시대 수도원, 현대의 학교, 공장, 군사기지 같이 "집단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 어떤 종류의 압박을 받고 있고, 그 장소에서 자유로이 벗어나기 어려운 곳"이 심리적 전염이 잘 일어나는 전형적인 장소라고 지적했다.
'아바나 미스터리'가 일어난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도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국교를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50여년간 적대관계 속에서 미국이 끊임없이 전복을 추구했던 쿠바의 심장부에 있다. 게다가 2016년 대선 유세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을 철회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게다가 대사관 직원 상당수는 CIA 비밀요원들이었다.
집단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 속에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의료 정보 등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까지 겹치며 음파 공격 음모론이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 사이에서 전환 장애의 급속한 확산을 초래한 것이다.
전환 장애로 인한 신체적 증상은 아프지 않은데 아픈 척 하는 꾀병이 아니다. 스트레스와 공포 등의 심리가 실제로 신체적 질환으로 전환된 것이다.
실내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미칠 만한 음파 무기는 제트 엔진 4기를 한꺼번에 돌릴 때 정도의 굉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쿠바가 그런 무기를 사용했다면 특정 공격 대상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영향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난해 1월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초저주파와 초음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대역의 음파 등 3가지 모두를 갖고 실험해 본 결과 미국 외교관들이 겪은 신체 증상을 일으키는 음파적 원인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로 인해 음파 무기가 배제되자 나온 것이 전자레인지에 쓰이는 마이크로파 무기설.
귀를 향해 마이크로파를 쏘아 귓속 온도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올리기만 해도 수분 분자를 격탕시켜 공격 효과를 낸다는 것인데, 이는 피해자들이 들었다는 이상한 소리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익명의 정보기관 관계자들 말을 인용한 뉴욕타임스의 이 보도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과학계의 가짜 뉴스에 해당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마이크로파로 음파 공격 효과를 낼 정도라면 마이크로파 조사 대상자를 바싹 태워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아바나 미스터리' 발단에서부터 전개과정을 되짚어 보면 각 단계마다 쿠바 측이나 서방 측에서 음파 공격 음모론에 반하는 과학적 이론이 제기되고 `귀뚜라미와 전환 장애' 설명이 제기됐으나 미국 국무부는 아바나 주재 외교관들을 다수 철수하는 등 음모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비오 의원도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2년여에 걸친 `아바나 미스터리'의 이러한 전개와 관련, 탐사전문 온라인 매체 `인터셉터'는 지난 8일 "익명의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속닥속닥하는 말을 언론이 무분별하게 받아 옮기는 관행"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방조한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유력 언론매체들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나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 간 동맹에 관해 딕 체니(부시 행정부 때 부통령) 등이 조작한 말을 믿도록 온 나라를 기만했다"는 것이다.
호주의 로위 연구소도 15일 초반부터 귀뚜라미 이론이 제기됐음에도 외교관 철수와 이를 통한 미국-쿠바 관계 개선의 탈선이라는 중대한 외교적 결정들이 "몇 가지 의심스러운 의학적 소견과 많은 과장선전들에 근거해" 이뤄진 것을 개탄했다.
이번 사건은 "미국 행정부의 망신일 뿐 아니라, 정상적인 설명은 제쳐둔 채 가장 기괴하고 뒤틀린 이론이 확대재생산되는, 정치적 목적으로 부풀려진 음모이론이 판치는…음모 포퓰리즘의 광범위한 흥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귀뚜라미와 전환 장애'가 더 쉽고 자연스럽고 더 타당한 설명이지만, `쿠바가 음파 무기로 미국 외교관을 공격했다'는 음모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고 정치적으로도 쓸모가 많기 때문에 성가시게 그 증거를 따져보지 않는 경향을 말한다.
음모론의 확산엔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도 있지만, 언론 산업의 수익 모델과 정보 소화 방식의 변화 역시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로위 연구소는 진단했다.
"온라인상의 전쟁에서, 가장 정확한 얘기보다는 가장 재미있는 얘기가 승자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가능성(possible)일 뿐인 음파 비밀병기가 개연성 높은(probable) 귀뚜라미 울음소리보다 더 많은 클릭 수를 기록하게 된다"
뉴스 선택의 알고리즘이 이런 경향을 더욱 극단화한다고 로위 연구소는 덧붙였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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