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10년] ② 끊이지 않는 철거민 문제…"구조적 해법 절실"
"이주보상비 비현실적…보상받고 나가도 주거여건 되레 악화"
"민간은 이익 극대화 추구하기 마련…공공영역 개입 필요"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정래원 기자 = "서울 마포구 아현2구역 철거민이었던 박준경씨가 유서에 쓴 말 있잖아요. '내일이 오는 게 두렵다'는 말. 제가 가장 절감한 말이에요. 사람이 희망이란 게 있어야 하는데, 희망이 봉쇄되는 순간 삶의 의욕이 사라지잖아요."
서울 성북구 장위7재개발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조한정(59)씨는 지난해 겨울 초입 아현2재건축구역 철거민 박준경(37)씨의 비보를 듣고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세입자였던 박씨는 강제집행으로 거주지가 사라지자 유서를 남기고 실종됐다가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09년 1월20일 용산 남일당 철거민 농성 강제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진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다. 용산참사 이후 '사람은 없고 개발만 있는 도시개발'에 관한 문제제기가 꾸준히 이어졌지만, 철거민 문제는 여전히 재개발·재건축구역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도시개발 과정 전반에 주민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고, 개발 여파로 불가피하게 보금자리를 잃는 이들에게 현실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철거민 문제는 계속된다는 것이 철거민과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갈등 해결을 위한 공공의 역할, 관련 법제 정비 등 시스템 개선도 필요하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 쫓겨나듯 내몰리고 주거조건은 되레 악화…"철거민 문제 구조적 원인"
"재개발이 도시 전체 차원에서 필요하다 해도 현재 사는 사람들이 '나는 못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도 자유의지잖아요. 그렇다면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보상 기준인 감정평가액은 실거래가보다 훨씬 낮아요. 원래 살던 곳과 여건이 비슷한 곳으로 옮길 수 없다는 거죠. 철거민 투쟁은 그래서 발생하는 겁니다."
수년 전 성북구의 또다른 재개발구역에서 반대투쟁에 참여한 주민 최모(61)씨는 도시개발 과정에서 벌어지는 철거민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이렇게 짚었다. 그가 살던 곳은 재개발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된 끝에 결국 주민투표를 거쳐 개발구역에서 해제된 터라 다행히 철거민 투쟁까지는 가지 않았다.
재개발·재건축 등 도시개발은 많은 주민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사업이다. 처음부터 사업 자체에 동의하지 않았거나, 사업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부담금을 감당할 수 없어 분양을 포기하는 주민도 있다. '이주보상비를 받고 나가면 되지 않으냐'고 하지만 보상비가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업을 추진하는 조합은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만큼 보상비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고, 주거생존권을 지키려는 주민들은 적어도 실거래가 수준의 보상을 원하다 보니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업 구역마다 '조합과 감정평가사가 유착했다'는 등 분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발에 따른 혜택은 고사하고, 원하지도 않은 개발사업 때문에 애초 거주지에서 쫓겨나듯 내몰리고 주거조건은 오히려 악화되는 상황이 철거민 문제의 시작이라고 경험자들은 지적한다.
장위7구역 조한정씨는 "실제 집값만큼 보상도 못 받고 나가는 사람이 많으니 보상을 받은들 원래 살던 곳 주변으로는 이전하지 못한다"며 "철거민들이 최대한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해봐야 내가 살던 환경만큼 옮겨 살겠다'는 '수평이동'인데, 이런 요구가 마치 떼를 쓰는 것처럼 된다"고 말했다.
길음1구역 이주대책위원회의 진지원(51) 위원장은 "애초 아파트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고 집안 사정도 있어 재개발을 반대했다"며 "조건이 비슷한 인근 집으로 옮기고 싶었는데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금이 책정되는 바람에 평범한 중산층이었던 가족이 하류층으로 떨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용산참사는 이와 같은 갈등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 사례다. 토지 소유주도 아닌 상가세입자였던 철거민들은 개발이익을 누리기는커녕 권리금과 가게 시설 투자비를 고스란히 날린 채 3개월치 휴업보상금과 얼마 되지 않는 주거이전비만 받고 쫓겨날 처지가 되자 투쟁에 나섰다가 비극을 맞았다.
특히 상가세입자들은 개발사업으로 단순히 가게를 옮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간 형성된 상권과 단골손님까지 잃는 결과를 떠안아야 한다. 이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근 몇년새 사회문제로 떠오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도 갈등의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상인들의 노력으로 지역 상권이 활성화하면 건물주가 바뀌는 등 과정을 거쳐 임대료가 크게 오르고, 그 결과 애초 상권을 일군 주역이었던 상가세입자들이 쫓겨나는 현상이다.
상가세입자의 건물주 폭행사태까지 간 '궁중족발' 사례에서 보듯 일부 상인들은 임대료 인상이 부당하다며 버티다 건물주로부터 명도소송을 당하기도 한다. 패소 후에도 계속 버티다 강제집행이 들어오면 물리력으로 저항해 막아내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건물주와 갈등은 계속 커지기 마련이다.
기반시설까지 정비 대상에 포함돼 공익사업 성격을 인정받는 재개발과 달리 단순히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 재건축은 세입자 보상 등 장치가 훨씬 취약하다.
지난해 강제집행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아현2구역 철거민 박준경씨도 재건축지역에 살던 세입자였다. 결국 그가 숨지고 나서야 조합과 철거민대책위원회가 협상을 벌여 조합이 유족에게 장례비와 위로금을 지급하고, 강제철거에 맞서 남은 3가구에 임대주택 알선 등 이주대책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 김남근 변호사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적용 대상인 재건축에는 주거·상가세입자에 대한 이주대책 수립과 보상금 지급 등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특히 상가세입자는 영업이 중단되는데 아무 보상이 없어 극력 저항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 "사업 절차 등에 공공영역 개입해 갈등 줄여야"
개발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철거민 문제 등 분쟁을 줄이려면 자치단체 등 공공영역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데는 철거민과 전문가들 모두 대체로 의견을 같이한다.
개발사업은 낙후한 주거환경 개선과 더불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일이고, 사업 주체인 조합은 이익 추구를 우선시하기 마련이니 그에 따른 갈등을 막을 행정기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성북구 주민 최씨는 "재개발은 지역 전체를 바꾸는 문제인 만큼, 사업 추진 주체는 민간 조합이지만 절차적 구조 등에는 관(官)이 합리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며 "그래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쫓겨나는 사람에게도 현실적 보상을 해 문제 발생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지원 길음1구역 대책위원장은 "성북구 도시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 권고를 조합장이 거부했는데도 구는 속수무책"이라며 "구에서 '조율이 안 되면 착공신고를 못 받아준다'고 하면 조합의 태도가 바뀌고 합의를 시도할 수도 있을 텐데 구에서는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계획 수립 단계부터 사업 시행 과정의 갈등 조정까지 개발사업 전반에 관여할 공적 성격의 기관을 별도로 둬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부동산 전문가들로 '서울시 재개발청'과 같은 조직을 둬 독립성을 갖고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부문에서는 이익 극대화를 원하지, 공동체 이익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른바 '공공 디벨로퍼(developer)'라는 존재가 참여해 공동체 이익을 보해해줘야 하는데 국내에는 공공 쪽에서 그런 역할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업에 재개발청과 같은 공공 디벨로퍼가 관여할 필요는 없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이나 저소득층 등 서민 관련 문제에는 개입해 협상을 해줘야 한다"며 "공공 디벨로퍼에는 권한이 주어져야 하고, 자치단체로부터 독립적 성격을 지녀야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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