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트랙터에 뭉개지는 배추…가슴에 멍드는 농심
가격폭락 가을배추 1천392t 폐기…전국 1만9천t 시장격리 조치
(영암=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내가 키우고, 내가 갈아엎고…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소"
9일 생산량이 크게 늘어 가격이 떨어진 가을배추를 산지에서 직접 폐기하는 전남 영암군의 한 농가 현장.
좁디좁은 시골길을 지나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의 마을 가장 안쪽에 들어서자 1만㎡의 밭 위로 봉긋하게 올라온 배추가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싱그러움까지 느껴진 배추밭에 가까이 다가서니 이미 배추들은 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한 달 전에는 수확해 출하됐어야 할 가을배추였다.
하지만 산지 가격은 특상품 배추 3포기가 들어있는 한 망에 1천600원밖에 쳐주지 않았다.
당시 배추 9천 포기를 출하한 이웃 농가는 인건비와 운송비 등 들어간 비용을 뺐더니 수익은 고사하고 1만5천원 손해를 봤다.
밭 주인인 유모(58)씨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장격리조치에 동참해 산지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2번째 산지폐기를 하는 유씨는 체념한 듯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중국산 배추와 김치가 들어오면서 배추 산지가격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먹고는 살아야 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또다시 폐기를 하게 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배추 폐기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트랙터에 올라탄 유씨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밭을 가꾸려고 큰마음을 먹고 마련한 트랙터로 밭과 농작물을 뒤엎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유씨의 타들어 가는 마음과 달리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는 배추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루가 돼 흩어졌다.
유씨는 제대로 갈리지 않은 배추는 뿌리째 뽑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며 애써 아쉬운 마음을 그렇게 감췄다.
그렇게 유씨의 '배추꽃밭'은 황무지로 변해갔다.
유씨는 "이런 식의 산지폐기 정책은 애써 농사를 지은 농민들만 허탈하게 할 뿐"이라며 "정부가 농민들의 현실을 반영해 파종부터 계획을 세우는 등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가을배추는 남은 물량이 8만1천t에 달해 평년 6만3천t보다 1만8천t 많고, 날씨가 좋아 월동배추 생산량도 평년보다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농식품부는 배추 농가의 경영 안정을 위해 배추 1만9천t을 시장에서 격리하기로 했다.
전남도는 우선 10일까지 해남과 영암 등에서 가을배추 15.5ha, 1천392t을 폐기하기로 했다.
해당 농가에는 3.3㎡당 4천740원을 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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