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병과 약…"의학이 세계사 지형 바꿨다"
그 결정적 장면 살핀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인류 역사는 질병의 역사이자 그 극복의 역사이기도 했다. 사실 전쟁보다 질병이 인간 생존에 훨씬 치명적이었다. 멸종을 막으려는 인간 열정이 오늘날의 인간 수명과 건강, 행복을 가져왔다.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100년 전만 해도 인간 평균수명은 마흔살을 넘지 못했다. 예컨대 1900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 중 돌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비율이 4분의 1을 넘었다. 하지만 1930년대에 페니실린이 발견되면서 수명은 급격히 높아졌고, 심지어 전쟁의 판도까지 뒤바꿔놨다.
2년 전, 세계보건기구(WHO)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기대수명을 분석해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세계 최초로 90살을 넘어섰고, 한국 남성의 기대수명도 세계 1위에 올라섰다. 그만큼 의료서비스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의학자인 단국대 서민 교수가 고대의 주술사에서 현대의 AI(인공지능) 의학까지 세계사 지형을 바꾼 의학의 결정적 장면들을 담은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를 펴냈다.
이번 책은 기생충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찬찬히 들여다본 '서민의 기생충 열전'에 이어 저자가 두 번째로 출간한 저서다. 20년째 의과대학에서 강의 중인 서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하는 의학과 그 발전으로 달라진 세계사 흔적들을 생생한 언어로 전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질병'은 한 시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질병 극복사는 곧 의학 발전사이자 인류 문명 발전사였던 것. 그런 점에서 "의학은 학문이고 기술이다"고 일찍이 설파한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역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했다. 그 대표 사례로 중세시대 흑사병 공포를 들여다보자.
당시 최고 지식인은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의사는 아니었지만, 약초(허브) 등을 이용해 내과 치료를 하며 의사보다 더 환자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유럽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사병 앞에서는 제아무리 사제라 해도 무력했다. 흑사병에서 구해달라며 사제의 조언대로 신에게 빌고 또 빌었으나, 흑사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해버린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천 년을 지배한 교회가 흑사병에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교회와 신에 대한 믿음을 거둔다. 말 그대로 병이 세상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후 철학자들은 신에게서 인간으로 세상의 중심을 옮겨간다. 신권이 하락한 것과 달리 왕권은 강화했다. 결국 흑사병의 대유행을 끝장낸 것은 신이 아니라 국가가 만들기 시작한 위생과 검역 절차였던 것. 검역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유럽 각국은 15세기 들어 방역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다.
서 교수는 관점을 넓혀볼 때 '병'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만약 중세 때 흑사병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번 저서는 병을 신의 형벌로, 의사를 마법사로 보던 고대 시대부터 살핀다. 이때 가장 유명한 진료소는 의술의 신이자 아폴론의 아들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었다. 신이 병이라는 벌을 내렸으니 신전에 가서 잘못을 고하고 사죄하는 일이 치료였던 것이다.
책은 이어 의학이 신에서 인간으로 넘어온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살펴보고, 문명의 충돌과 공존을 통해 의학이 진일보한 근대 시기로 넘어간다. 콜레라를 잠재우기 위해 상하수도 시설을 개편하는 존 스노 이야기, 천연두 백신을 만들고 전파하려는 의학자들의 노력, 감염에서 살아남기 위해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하기까지의 죽음들을 더듬어본 것.
현대 시기를 대표하는 건 예방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약의 발전으로 정신질환자들은 강제수용에서 치료 대상으로 전환되고, 장기이식 기술의 발전과 면역억제제들의 등장은 아픈 이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꿈꾸게 했다. 나아가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인간에게 꼭 맞는 치료가 진행되려는 시점에 와 있다. 요컨대, 세계사적 사건들로 의학이 발전했다면 이제는 의학 발전이 세계사 풍경을 바꾸는 시대가 됐다고 하겠다.
서 교수는 "의학은 실험실 속에서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이끌어간 것 같지만, 오히려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거나 사회가 변동할 때 더 많이 발전했다"고 들려준다. 의학이 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어 의학 역사를 아는 것이 곧 인간의 역사를 아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 '의학의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인다.
생각정원 펴냄. 416쪽.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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