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비격진천뢰는 124년전 관군이 남긴 유물일까
6점 나온 수혈서 조선 후기 기와·무구 나와
(고창=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최초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진주성,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을 떨게 했다는 무기다.
중국에서 개발한 폭탄인 '진천뢰'와 달리 약 500∼600m를 날아간 뒤 일정 시간이 흐르면 터진 점이 특징이다. 포탄 안에 넣은 쇳조각이 섬광과 굉음을 내면서 일제히 흩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전한다.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나온 비격진천뢰 11점은 수량이 많고 아직 사용하지 않아 각종 발화 부품이 내부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고고학 성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단 6점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나온 유물은 창녕 화왕산성과 진주성 출토품밖에 없다. 게다가 이 폭탄들은 이미 사용했거나 속이 비어서 포탄 작동 원리를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무장읍성을 발굴한 호남문화재연구원 이영덕 조사연구실장은 15일 현장 설명회에서 "비격진천뢰를 임진왜란 유물로만 인식하는데, 고창에서 나온 포탄은 조선 후기에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무장읍성은 1417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큰 전투를 치렀다는 기록이 없다"며 "무장읍성 자체는 오랫동안 상당히 평온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장읍성을 군사적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은 "무장현에 화포군(火砲軍) 40명을 설치했다"는 조선왕조실록 고종 9년(1872) 3월 24일 기사에서 확인된다.
고종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뒤 해안 방어 강화를 지시했고, 그 과정에서 무장읍성에도 화력이 강한 군대가 배치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실장은 "무장읍성 비격진천뢰가 언제 유입됐는지 판단할 만한 자료는 없다"며 "동학농민군은 1894년 4월 무장현에 진입할 때 읍성 관아에서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가 며칠 뒤에 성을 차지했는데, 이때 관군이 약탈 위기를 모면하고자 은닉했을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비격진천뢰를 구덩이에 가지런하게 모아뒀고, 포탄이 나온 수혈(竪穴·구덩이) 유적에서 조선시대 후기 기와가 나왔다는 점이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 실장은 "비격진천뢰 아래에서 창끝에 끼우는 뾰족한 쇠인 물미와 화살촉 같은 무구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며 "만일 포탄을 사용하려고 했다면 상자에 따로 잘 보관하지 않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아울러 1922년에 간행된 '전선원무장읍지'에는 "군기고(軍器庫·무기를 두는 창고)는 성내에 있었으나 없어졌다. 군기는 갑오동란(1894)에 산실됐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 실장은 "무장읍성은 일제가 1910년 읍성 철폐령을 내리면서 기능을 상실했다"며 "호남 의병 활동 측면에서도 중요한 유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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