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대신 불로 그린 회화…보고시앙 "태운다는 것은 승화"
벨기에 유명 컬렉터 겸 작가…7일부터 뮤지엄그라운드 개인전
(용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옅게 드리운 안개 아래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굽이친다. 물과 먹으로 그려낸 듯한 이 호젓한 풍경은 사실 불과 연기에 빚지고 있다.
장 보고시앙은 붓 대신 토치를 잡는다. 종이가 불에 그을리고 구멍이 뚫리면서 동양적인 풍경이 탄생한다. 벨기에 예술재단 보고시앙의 수장이자 컬렉터로 더 알려진 '작가' 보고시앙을 5일 용인의 현대미술관 뮤지엄그라운드에서 만났다. 한지 입체화 작업을 하는 전광영 작가가 세운 뮤지엄그라운드는 개관전 주인공을 보고시앙으로 내세웠다.
"보고시앙 재단에서는 제 개인의 작업이나 전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곳은 새로운 현대미술의 방향과 흐름을 제시하는 곳이니깐요. 제가 작가로서 이름을 걸고 이렇게 개인전을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올해 69세인 보고시앙의 삶은 굴곡 많은 중동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르메니안계인 보고시앙은 1949년 시리아 북부 알레포에서 태어났다. 8년째 계속되는 내전으로 지금도 엄청난 비극이 이어지는 곳이다. 레바논으로 옮겨간 보고시앙 가족은 1975년 레바논내전이 발발하자, 벨기에 브뤼셀로 다시 삶터를 옮겼다. 이후 아버지로부터 보석사업을 물려받아 사업을 키웠다.
보고시앙은 1992년 가족과 보고시앙재단을 설립해 조국 아르메니아·레바논의 인도적 지원뿐 아니라 문화예술 후원에도 힘썼다. 특히 2006년 브뤼셀 빌라 엉팡을 취득, 이곳에서 각종 전시와 미술행사를 마련한 것이 주효했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단색화' 특별전을 함께 주최하면서 국내에도 이름을 알렸다.
보고시앙은 보석사업가에서 작가로 변신한 배경으로 "늘 무엇인가를 드로잉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캔버스와 색연필, 물감 등을 선물하면서 나 자신도 창작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해왔던 보고시앙은 10여년 전부터 '불'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뮤지엄그라운드 개관전 '심연의 불꽃'은 근작 수십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종이와 캔버스뿐 아니라 거대한 나무판, 책 등을 불태워 만든 작업이 다양하게 나왔다.
그을음이나 연기를 조련해 아름다움이나 초월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작업을 둘러보던 보고시앙은 "(작업 완성 전까지) 대단히 많은 쓰레기더미가 나왔다"며 웃음 지었다.
미술관 안쪽 나란히 걸린 2점은 한국에서 선보인다는 점에서 더 각별한다. 하늘로 뻗은 거대한 기둥을 연기로 그린 듯한 왼쪽 작품은 4년 전 방북해 평양 류경호텔을 본 뒤 그 이미지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산수화를 떠올리게 하는 오른쪽 그림은 한국 풍경을 형상화했다.
작가는 "불로 태운 이 그림을 통해 평양으로 대변되는 북한의 정치상황이 새롭게 변모하길 바란다"며 덕담했다.
"무엇인가를 태운다는 것은 파괴가 아닌, 기억과 역사를 끄집어내는 일입니다. 제가 거주했던 나라들에서 전쟁도 많이 겪었지만, 제 작업은 불태워 무엇인가를 없애고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승화를 알리는 것이죠."
전시는 내년 3월 24일까지. 입장료 등 문의는 ☎ 031-265-8200.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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