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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정권 70주년 9·9절 D-5, 전환의 길에 섰다…과거냐 미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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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정권 70주년 9·9절 D-5, 전환의 길에 섰다…과거냐 미래냐
'시장세대'의 경제욕구 분출속 北, 美와 국가명운 걸고 핵담판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로 경제 성과 부진속 北주민 불만 쌓일듯





(서울=연합뉴스) 장용훈 기자 = 이달 9일로 북한 정권은 고희(古稀)를 맞는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를 거친 70주년 기념일이다. 북한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열병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인다.
올해가 강산이 7차례 변했다고 할 정권 수립 70주년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안팎으로 큰 변화를 시도한 해라는 점에서 김 위원장은 물론 주민들로서도 예년과 다른 느낌일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6년 5월 제7차 당 대회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을 견지하면서 경제 쪽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이어 올해 들어 신년사를 시작으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경제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4월 노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핵·경제 병진 노선을 버리고 경제건설 총력 의지를 선언했다. 이는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한 외교·안보 환경을 개선하고 주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도록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북한 주민이 올해 9·9절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바꿔말하면 김 위원장으로선 큰 부담을 져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북한으로선 정권 수립 이후 70년 모두 격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으나,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북한으로선 말 그대로 전환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명운을 걸고 핵 담판을 해야 하는 데다 장마당에 익숙한 '시장세대'의 경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어서다.
북한 정권의 70년은 1948년 9월 9일 김일성 주석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시작됐다. 그에 앞서 1947년 가을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가 무산됐다.
그러고 나서 북한은 1950년 6·25전쟁을 감행했다.
전쟁은 북한 전체를 파괴하다시피 했지만,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전체주의 시스템이 작동할 토대를 마련했다. 그 이후 반대파 숙청과정을 거쳐 1인 체제의 틀을 다진 김일성은 1972년 주석제를 골간으로 한 수령제를 다졌다. 1974년에는 김정일이 노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등장하면서 후계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 주석 생존 당시 후계자 수업을 충분히 받은 김정일은 1994년 7월 부친 사망 이후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라 북한을 통치했다. 이어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으로 김정은이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북한은 김일성 주석-김정일 위원장-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에 성공하면서 수령을 중심으로 당과 대중이 일체화된 유일 지배체제를 유지해왔다.



북한의 3대 세습정권은 수령제 구축을 통한 사상 통제와 감시로 안정적 정치시스템을 만들었으나, 이는 경제적으로는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1960년대부터 '천리마운동' '70일 전투' '100일 전투' '200일 전투' 등 속도전을 경제발전 방법론으로 활용했으나, 경제적 자립을 주창하면서 외부로부터 자본과 기술의 유입을 배격한 '자기 완결적인 경제구조'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 유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가가 임의로 생산의 계획과 분배를 주도하면서 자원의 합리적 배분이 이뤄지지 못하는 왜곡된 경제구조가 발전의 길을 갈 리는 만무했다. 1990년대 중반 잇단 자연재해와 맞물리면서 북한 경제의 피폐 현상이 본격화했다. 이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이 수년간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원 부족으로 공장 가동은 중단됐고 식량난과 재정의 고갈 속에 국가는 분배를 통해 주민들의 배를 불릴 수 없었다.
주민들은 스스로 먹고살 궁리를 하며 곳곳에 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북한 당국도 이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과 북일정상회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외연을 확장하는 한편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통해 경제 발전을 추구했지만, 북한의 핵 개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가 마감되고 나서 뒤를 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더 과감하게 변화의 문을 열었다.
김정은 정권은 2012년부터 시장을 사실상 합법화하고 농민과 노동자, 기업 등 각 경제주체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고 벌어들인 수익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독립채산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특히 각 경제주체가 생산물을 시장에서 처분해 이윤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경제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최근 공개한 '시장들: 북한에서 사(私)경제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허가한 공식 시장이 약 436개라고 한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2014년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146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봐도 그런 변화가 확연히 느껴진다. 응답자의 95%가 시장에서 필요한 의류를 샀다고 답했고, 먹을거리 등 다른 생필품도 대부분 시장에서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시장화는 또 유형의 재화를 팔고 사는 전통적인 형태를 넘어서 부동산, 노동력, 자본 등을 거래하는 단계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부동산 거래가 늘고 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탈북자 설문조사에서도 돈을 주고 주택을 산 경우가 66.9%로 국가에서 집을 배정받은 경우(14.3%)의 4.7배에 달했다.
이런 경제변화 속에서 북한에는 돈으로 돈을 버는 사적 금융도 생겨나고 있다. 장사 등을 통해 큰돈을 번 사람들이 낙후한 금융시스템의 틈을 파고들어 금융업으로 이윤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에서 은행의 기본 업무인 대출, 송금, 환전 등을 대행하는 사금융이 나타나고 있다"며 "돈주들은 시장화의 기류에 편승해 고리대금업, 전당포, 아파트 건설 등 다양한 이권사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은 주민들의 생활양식과 인식도 바꾸고 있다. 휴대전화의 빠른 보급과 개인주의에 젖어든 이른바 '시장세대'는 정치보다는 돈을 우선시하며 북한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고 있다.
김정은 정권도 이런 사회적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이 핵-경제 발전 병진노선의 완료를 선언하고 경제발전 집중노선은 택한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북한 내의 이런 변화가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는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외부 자본과 기술의 도입을 위해선 대북제재를 미국과 담판을 벌여, 적어도 평화협정 체결에 이은 북미 수교가 이뤄져야 가능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래로 갈 것이냐 아니면 과거로 회귀할 것이냐의 기로에 섰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9·9절에 내놓을 김 위원장의 메시지는 이와 관련해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되고 북한의 고위층뿐 아니라 사회 내부적으로 엄청난 기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김정은 위원장은 이 기대감을 잘 알고 있고 미국과 담판을 통해 그동안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 북한을 만들기 위해 협상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아무런 결과 없이 핵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소진하면 가진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해는 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행보가 필요한 시점이고 그래야만 새로운 북한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jy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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