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인건비도 안 되니 그냥 버립니다"…산지 폐기하는 오이 농가
생산량 급증에도 상품성은↓…폭염 이어지자 거래가 3분의 1로 뚝
화천 애호박에 이어 횡성 오이까지…농민들 "뙤약볕이 야속해"
(횡성=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15년째 오이 농사짓지만 이렇게 힘든 시기는 처음입니다. 땀 흘려 키운 작물을 다 내다 버려야 할 지경이네요."
31일 오전 강원 횡성군 갑천면에서 3천300여㎡ 규모로 오이 농사를 짓는 김영식(59)씨는 내리쬐는 뙤약볕이 야속하기만 하다.
올여름 횡성 지역에는 큰 태풍이나 수해가 없어 오이 생산량이 25% 이상 늘어났지만 출하 값은 도리어 폭락한 까닭이다.
횡성 청일면과 갑천면은 7월 서울 가락동 농산물시장 물량의 30% 선을 점할 정도로 국내 대표 취청오이(청오이) 생산지다.
평년이면 7월 중 하루 15t가량 생산하지만, 올해는 폭염으로 20t을 훌쩍 뛰어넘었다.
생산량이 폭증하자 이달 초 10㎏ 한 상자에 2만원 이상 받던 오이 가격이 최근 7천원까지 곤두박질 쳤다.
지역 오이 농가는 출하 가격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애통한 심정으로 밭에서 딴 오이를 그 자리에서 폐기하고 있다.
김씨 오이밭 귀퉁이에도 산지 폐기한 오이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한 상자에 1만5천원은 받아야 인건비라도 겨우 남긴다"며 "1만원도 안되는 오이를 출하하면 운송비에 포장비까지 따져 결국 적자"라고 토로했다.
김씨는 아쉬운 마음에 부인과 함께 상품성이 좋은 오이만 골라 상자에 담았다.
그는 최근 하루에 50상자가 넘는 오이를 수확하지만, 그 중 상자에 담는 것은 10상자도 채 안 된다.
매일 400㎏을 밭에 버리는 셈이다.
주위 농가까지 합치면 매일 산지 폐기하는 오이가 10t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땅에 버리고 있지만, 가격 오름세는 2∼3천원 꼴이다.
상품성 저하는 더 큰 골칫거리다.
갓 딴 제철 오이는 짙은 초록색이어야 하는데 강한 햇볕에 오이 끝 부분이 누르스름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오이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져 가격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김씨는 "맛에는 문제가 없지만, 소비자들이 오래된 오이로 생각해 구매를 꺼린다"고 설명했다.
횡성 청일지역 160여 농가(30여㏊)는 노지재배를 통해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오이를 출하한다.
이 중 7∼8월은 오이 수요가 많아 한창 소득을 올릴 때다.
인건비는커녕 비룟값도 안 나오는 오이 가격이 3주째 이어지자 지역 농가는 농사를 포기할 지경이다.
과거 이런 현상이 1주가량 이어진 적은 있었지만, 이토록 지속하는 것은 농민들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애써 가꾼 오이가 제값을 받으면 농민들은 하루에 잠을 1시간만 자도 힘이 난다"며 "지금은 '내일은 더 낫겠지' 하는 희망도 없으니 농사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인근 화천군도 최근 폭염으로 말미암은 생산량 증가로 애호박 8㎏짜리 1상자 가격이 9천원에서 2천원 선으로 떨어지면서 산지 폐기를 결정했다.
화천은 매년 7∼8월 전국에 유통되는 노지 애호박 물량의 70%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 주산지다.
땀 흘려 일군 작물을 제 손으로 버려야 하는 강원지역 농민들의 마음은 뙤약볕 아래 건초 마냥 타들어 가고 있다.
yangdo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