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서 즉흥곡 '뚝딱'…"'냉장고를 부탁해' 찍는 기분"
피아니스트 박종해, 관객이 건네는 주제로 45분간 즉흥 무대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작년 3월 서울 종로구 금호아트홀 무대. 피아니스트 박종해(28)는 관객들이 무작위로 던져준 음(音) 4개를 활용한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이게 될까?'하는 눈빛으로 음을 고른 관객들 앞에서 박종해는 한두 번 머리를 긁적이는가 싶더니 바로 유려한 왈츠 선율을 뽑아내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등지에서 열리는 제15회 평창대관령음악제에서도 그의 즉흥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박종해는 오는 28일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공연 '네 멋대로 해라'에서 관객들이 던진 주제나 멜로디에 맞게 즉석에서 음악을 뽑아낼 예정이다.
전화로 미리 만난 그는 "사실 저 혼자 연습실에서 놀면서 치던 건데 무대 위에서 놀라고 하니 참 부담된다"며 웃었다.
즉흥 연주라고 하면 바로 재즈를 떠올리기 쉽지만 박종해가 선보이는 즉흥은 조성(調性)에 기반한 클래식 음악이다.
실제 클래식 음악사의 도입부에도 즉흥 연주가 성행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 유명 작곡가들은 당대 뛰어난 즉흥 연주가로도 이름을 드높였으며, 바로크 시대에는 악보에 표기된 반복적인 왼손 저음부 위에 즉흥으로 오른손 파트의 화성을 보충해 나가는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 양식이 유행했다.
하지만 작곡가와 연주자 역할이 점차 분리되고, 악보에 있는 대로 연주하는 게 관습이 되면서 즉흥 연주 영역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러니까 박종해는 200년 전 클래식 음악계 중심에서 가장 사랑받던 음악회를 평창에서 재현하는 셈이다.
그에게도 전체 프로그램을 즉흥으로만 이끌고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년 금호아트홀에서는 2부 공연에 한해, 2016년 공연에서는 앙코르곡에 한해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그에게 이 같은 보기 드문 연주회를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피아니스트 손열음(32). 올해 평창대관령음악제 최연소 음악감독으로 데뷔한다.
"열음 누나는 아마 제가 연습실에서 노는 걸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한 명이에요. 독일 하노버에서도 함께 유학하며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요. 2011년 함께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출전했을 때 이런 즉흥 연주를 처음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그냥 긴장을 풀어주려고 재밌게 쳤던 건데 휴대전화로 영상까지 찍으며 흥미로워했어요. '무대 위에 올려야 한다'면서요."
손열음의 당시 바람이 7년 만에 이뤄지게 된 셈. 그는 언론들과의 사전 인터뷰에서도 주목해야 할 공연으로 박종해의 즉흥 연주를 언급하며 이번 공연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박종해는 즉흥 연주의 매력으로 관객 반응을 꼽았다. 즉흥 연주를 인기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비유하기도 했다.
"요리 재료가 다 갖춰진 상태로 진행되는 요리 프로그램도 있지만,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게스트들의 냉장고 안 재료들만 가지고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어 내잖아요. 게스트들이 어떤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요. 제 무대에서도 관객분들이 그런 종류의 재미를 느끼시는 것 같아요.(웃음)"
과연 즉흥 연주회답다. 공연이 코 앞이지만 연주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특정한 주제를 그 순간의 영감에 의존해 연주를 풀어나가는 방식, 관객에게서 주제 선율을 신청받는 방식 등이 다양하게 고려되고 있다.
"저 혼자 아이디어를 많이 짜봤자 객석에서 완전히 다른 아이디어를 던져주실 수 있으니까요. 고민하지 않고 평소처럼 논다는 기분으로 무대 위에 서려고 합니다. 청중분들이 좋은 아이디어로 많이 도와주실 거라고 믿어요.(웃음)"
sj997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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