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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이 이름에서 성을 쓰지 않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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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이 이름에서 성을 쓰지 않은 까닭은
만주 박사의 신간 '만주족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홍콩 영화배우 관즈린(關之琳·관지림)은 아버지가 만주족이다. 출생지는 홍콩이지만, 조상은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청조 만주 지역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훈 고려대 강사는 "관즈린의 성인 관은 만주족 성인 구왈기야를 줄인 것"이라며 "청 말기와 1911년 신해혁명 시기에 만주족에 대한 한족(漢族)의 적대감이 급격히 커지면서 만주족 성을 축약하고 변형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훈 강사는 신간 '만주족 이야기'에서 만주족 이름에 얽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공개한다. 청대에 만주족 성은 족보에만 기록돼 전한 박제화한 상징이었다는 것.
그는 "만주족 조상인 여진족은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했고, 씨족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 성(姓)을 의미했다"며 "생활 범위가 씨족 집단을 벗어나지 않는 한, 개인을 명명할 때 성을 쓰는 것은 무의미했다"고 분석한다.
이어 청대에 만주족이 독특한 사회조직인 팔기(八旗)를 운영하면서도 씨족사회 제도를 존속했기 때문에 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이름 첫음절을 성처럼 쓰기도 했다고 강조한다.
'만주족 이야기'는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만주족 역사와 문화를 개괄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14세기 중엽 이후 만주족 역사를 시간순으로 서술하지 않고, 특정한 주제를 정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생각해 보면 만주족은 우리 역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상이다. 조선은 만주족과 많이 접촉했고, 만주족 침략으로 병자호란을 겪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만주족에 대해 아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저자는 만주족과 청나라 역사를 한족 중심이 아닌 만주족 시각으로 보는 연구 경향인 신청사(新淸史)를 소개하면서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만주족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원나라가 1368년 중원에서 물러날 때 씨족 단위로 생활한 만주족은 누르하치(1559∼1626)가 1616년 후금을 세우면서 세력을 키웠고,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1592∼1643)가 만주족·몽골족·한인으로 구성된 대청국을 선포하면서 중국 역사 중심에 등장했다.
저자는 만주족 30여만 명이 1억 명 한인과 공존하는 상황에서 만주족이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켜내기는 쉽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만주족이 그나마 한인과 분리돼 폐쇄적으로 살았기에 문화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6대 황제인 건륭제(재위 1735∼1795)는 만주어, 수렵을 통한 군사 활동, 만주족 뿌리인 만주 지역의 숭고함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만주족이 한족에 흡수됐다는 통념을 인정하면서도 만주어가 한족 언어인 중국어에 단순하게 편입되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1771년 출간된 만주어 사전에 새로운 단어 5천여 개가 수록됐고 이때를 전후해 다양한 만주어 문법서가 간행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구어(口語)는 쇠퇴했으나 문어(文語)는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만주족이 한족에 한순간에 동화되지 않았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이다.
"만주족이 획득한 강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창안한 통치기술은 현대 중국에 계승됐다. 만주족은 중국에서 '만족'이라는 민족명으로 존재하며, 문화 유지와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너머북스. 460쪽. 2만6천500원.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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