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오정미 작가 "메타포 몰라도 즐길 수 있어요"
"칸영화제, 벤의 세계처럼 낯설었죠"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이 영화에는 한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삶과 정서가 담겨있어요. 그런데 국내 스코어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목마름이 있네요."
칸영화제 폐막 다음 날인 지난 20일(현지시간) 프랑스 니스 공항에서 만난 '버닝'의 오정미 작가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레드카펫과 수많은 외신 인터뷰, 영화제 소식지의 역대 최고 평점 등 낯설고 '비현실적인' 경험을 압축적으로 한 여운이 남은 듯했다.
"칸은 아주 낯설었어요. 보이는 근사함을 위한 시스템이 정착된 곳 같았죠. 매일 사진을 찍기 위해 일어나 플래시 불빛 앞에 서야 하는 느낌이랄까…마치 벤의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떠들썩한 칸과는 사뭇 달랐던 국내 반응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는 "국내 평론의 반응과 스코어가 상대적으로 미미해서 멍하고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그렇다고 '버닝'의 화력이 벌써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인터넷 영화 커뮤니티에는 "영화를 볼 때는 몰랐는데 하루 이틀 뒤에 여운이 많이 남는다"는 반응이 많다. 영화 속 상징과 은유 등을 놓고 토론도 활발하다.
최근까지 파리에 머물던 오 작가를 이메일로 만나 영화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오 작가는 이창동 감독과 함께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이 작품은 2016년에 이 감독님의 '분노 프로젝트' 중 하나로 들어왔어요. 제가 2013년 감독님과 처음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감독님은 세상의 분노에 관심이 많으셨거든요. 저도 졸업작품으로 분노한 여자에 관한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만났을 때, 이 작품을 잘 확장하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 작가는 "'버닝'은 시작부터 보통의 한국 사람을 위한 영화였다"고 떠올렸다.
"시나리오 회의가 꽉 막힌 날에는 감독님과 사무실 앞 홍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보곤 했어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힘이 났죠.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오면서 현실에 있는 공간을 찾았고, 연출·제작부가 취재에 합류한 뒤엔 더욱 다양한 보통 사람들을 만났어요. 새롭게 발견한 한국의 현실 속 공간과 보통 사람들이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왔죠."
시나리오는 수많은 수정을 거쳐 이야기가 확장되고, 디테일이 살아났다. 캐릭터도 조금씩 바뀌었다.
"2016년 시나리오 속 종수는 지금보다도 더 말이 없는, 생각과 행동이 더 단순해 보이는 인물이었어요. 벤 역시 지금보다 더 이미지 그 자체였죠. 종수에게 좀 더 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벤에 대한 종수의 분노, 즉 청년의 분노가 더 분명하게 느껴졌죠. 그런데 간단한 정답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둘의 만남이 너무 사회적인 맥락, 즉 가난한 자와 잘 사는 자로만 읽힐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원하는 건 이 만남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거였는 데요. 그래서 좀 더 개인적인 만남, 진짜 같은 만남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파주 사는 청년이 반포 사는 형을 만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형을 죽인다. 이런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처럼 구체적인 실감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극 중 해미(전종서 분)는 종수(유아인 )와 벤(스티븐 연), 두 남자를 잇는 인물이자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 중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이 쓰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개념을 듣는다. 리틀 헝거는 육체적인 굶주림에 직면한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을 뜻한다. "원래는 제가 오랜 시절 품고 있었던 메모에서 우연히 가져왔던 말인데, 그게 마치 운명처럼 해미의 중심이 됐죠."
영화 속에서 해미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상의를 탈의한 채 춤을 춘다. 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던 종수는 끝내 한마디를 던진다. "창녀나 그렇게 하는 거야."
오 작가는 "그 대사에서 사실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촬영 때 그 대사를 빼자고 말하는 스태프가 많았는데 제가 관철했죠. 그런데 칸에서 영화를 보니 꼭 필요한 대사였다는 확신이 다시 들었어요. 그 대사는 인물에 대한 질문을 만들고, 이야기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상영이 끝난 날 뒤풀이에서 만난 한 이스라엘 배우가 제게 와서 그 대사가 너무 와 닿았다고 말해줬어요. 그때 이야기라는 것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운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죠."
오 작가는 "제 글에는 평범한 여성으로서 욕망하거나, 욕망하길 두려워하는 것을 담는다"며 "그것이 영화의 본성, 예술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끔은 제 단편영화 속 여성이 주체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럴 때면 저는 착하고 모범적인 여성만을 그릴 생각은 없다고 답하죠."
오 작가는 연세대에서 러시아문학과 영문학 학사, 러시아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등의 책을 번역했다.
이후 TV 단막극 집필과 연극무대 경험을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피팅 룸' , '미스터 쿠퍼' 등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2013년부터 이창동 감독의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고, '버닝'으로 장편 시나리오 데뷔를 했다.
"'버닝'은 굳이 메타포(은유)를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예요. 이 작품을 보고 어떤 이들은 벤을 연쇄살인자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이들은 계급의 문제를 단순하게 드러냈다고 보죠. 누군가는 청년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하고요.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다고 봐요. 다만 자기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남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확장됐으면 좋겠습니다."
fusion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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