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은 현실적 선택…북측 변화 끌어내"
1948년 남북협상 70주년 학술회의 열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현실주의적으로 보면 김구와 김일성은 모두 정치가로서 남북협상에 임했다. 김구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남북협상을 추진했으며, 나아가 김일성을 이용해 통일정부의 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남북협상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우사 김규식 연구회가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1948년 남북협상과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개최한 학술회의에서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 김구의 선택이 다분히 현실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남북협상은 통일정부를 희망했던 김구와 김규식이 1948년 4월 평양으로 이동해 벌인 일련의 회담을 통칭한다. 북한이 주도한 남북연석회의와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이 참여한 4김 회담을 아우른다.
학계에서는 남북 분단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에서 추진된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행을 두고 이상주의적 행동이었다는 견해와 현실적 판단에 기반을 둔 활동이었다는 해석이 맞서 왔다.
이 교수는 "김구는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에 대항해 최고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해 남북협상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며 "통일을 열망하는 고귀한 이상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적 정치가의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동상이몽이었던 김구와 김일성 중 김일성의 현실적 힘이 더욱 강했다"며 "김구의 승부수는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미군정 요원이었던 버치가 작성한 문서를 바탕으로 김규식의 행동을 조명한 박태균 서울대 교수도 김구와 평양에 동행했던 김규식이 현실적 결정을 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했던 김규식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 "1948년 5월 10일에 열린 남한 단독선거에서 김규식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했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민족주의자로서의 명성마저도 잃을 수 있는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규식은 남북 지도자 회담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의 연기나 포기를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며 그에게 남북협상은 외세의 개입 없이 시작된 첫 번째 정치적 시도였다고 역설했다.
이신철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북한에서 보는 남북협상과 남북관계 개선 전망' 발표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동족상잔의 전쟁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남북협상은 확고부동해 보이는 북한의 혁명전략을 남측의 역량으로 변화시킨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오는 27일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그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고, 북한이 정상국가로의 지향성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면 축사에서 "김구와 김규식 선생의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각자의 길을 갔고, 민족 분단은 가슴 아픈 현실이 됐다"며 "두 분이 걸어가신 길은 민족통일을 향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