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정현 "시련이 잘 들러붙은 폐침목서 숭고함 느껴"
5월 22일까지 금호미술관서 개인전…설치·조각·드로잉 등 출품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950년대 중반 인천에서 9남매 일곱째로 태어난 소년의 놀이터는 철길이었다. 기차가 달려올 때면 침목 아래 깔린 자갈들이 무섭게 진동했다. 땅은 푹 꺼지는 듯하다가 다시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온몸으로 느꼈던 출렁거림의 기억은 선명히 남았다.
"그 기억들 때문에 침목에 더 끌렸던 것 같아요. 침목은 제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육중한 덩어리였어요. 그런데 침목이 품은 에너지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15년이 넘도록 계속 바라만 봤죠."
인체 조각을 하던 정현(62) 홍익대 교수가 침목에 손을 댄 것은 2001년 금호미술관 전시가 계기가 됐다. 전관을 다 사용하는 전시를 단순히 작품의 양이나 크기로 승부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가까운 화랑 대표가 "가장 해보고 싶은 순수한 작업을 해보라"고 조언했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침목이었다.
정현은 10일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17년 만에 개인전 '정현'을 연다. 지하 1층에 일렬로 늘어선 높이 3m의 침목 조각들은 관람객을 압도한다. 그는 기차의 엄청난 무게에 눌리고, 비바람에 시달리고, 자갈과 부딪혀 가며 10여 년을 견딘 침목들을 구해다가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자갈이 낸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아름답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견딤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들이죠. 시련이 잘 들러붙은 침목을 보면서 에너지와 숭고함을 느낍니다."
이번 전시는 침목 외에도 버려진 재료들을 새롭게 되살리는 작가의 작업 전반을 볼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장 1층을 가로지르는 길이 7m의 거대한 조각은 작가가 지난해 5월 함양의 목재소에 갔다가 발견한 대들보로 만들었다. 경상남도의 한 서원을 지탱했다는 300년 묵은 소나무 덩어리에는 구름이며 꽃이며 항아리를 그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눈길을 끈다. 작가는 "겪음이 살아있는, 소멸하기 직전의 이 대들보를 보는 순간 '내 것이네' 하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며 흐뭇해했다. 그가 대들보의 구멍에 꽂은 침목들은 접붙이기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위층의 작품은 주택개발예정지구에 포함되면서 철거된 작가의 옛집에서 수집한 목재들을 먹물로 염색한 뒤 쌓아올린 것이다. 굴착기 때문에 부서지고 찢기어진 흔적을 간직한 목재들은 한껏 예민함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는 1990년대 인체조각과 그의 작업 출발점이 되는 드로잉들이 함께 나왔다.
17년 만에 작가 개인전을 다시 마련한 금호미술관은 "수십 년 세월을 견뎌내고 용도를 다한 재료의 물성이 드러내는 인간의 초월적 역사와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전시는 5월 22일까지.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