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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종전 43년, 하지만 우리에겐 끝나지 않은 베트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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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종전 43년, 하지만 우리에겐 끝나지 않은 베트남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소대장님, 저기 앞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데 말입니다." "그래? 베트콩이다! 쏴 갈겨!" 가까이 가 보니 남편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는 부인, 넋 잃은 노파, 신음하는 아이들만 있었다. "이게 뭐야! 우리가 민간인을 죽인 거야?" "아냐, 총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야. 뒤져봐." 아무리 뒤져도 무기가 나오지 않자 소대장은 총검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난도질하며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하라고 강요했다. "빨리 해. 이 ××야. 어차피 죽여야 하잖아, 방법이 없잖아!" 신병이 주저하자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시키면 할 것이지, 왜 못하겠다는 거야!"(안정효의 자전적 소설 '하얀 전쟁'을 각색한 1992년 작 동명 영화의 한 대목)

#2. "새벽 4시, 마을에 폭격이 시작돼 가족과 함께 방공호에 숨었습니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군인이 총구를 들이밀며 외쳤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어깨에 호랑이 마크가 새겨진 군복 차림의 한국군 병사들이 온 마을 사람을 논으로 끌고 간 뒤 총을 난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팔다리가 잘려나갔습니다. 내 발꿈치에도 수류탄이 떨어져 몸에 파편이 튀었습니다.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다가 군인들이 가고 나자 가족을 찾아다녔습니다. 집은 불에 타 무너졌고 어머니는 하반신이 잘려나간 채 숨을 거뒀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만 주민 65명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습니다."(1966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응우옌떤런 씨가 2015년 4월 6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털어놓은 증언)

#3.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萬代)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중략)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 제국주의와 남한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베트남 꽝남성 빈호아 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의 문구)


베트남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쩐다이꽝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한국과 베트남이 모범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쩐다이꽝 주석은 "베트남전 과거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행사에서도 영상축전을 통해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도 각각 2001년과 2004년 쩐득르엉 당시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유감을 표시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양민 학살에 관해서는 엇갈린 시선이 존재한다. "한국군은 한 명이라도 죽거나 다치면 인근 마을 주민을 닥치는 대로 쏴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해 베트콩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베트콩이 민간인을 가장해 공격한 뒤 달아나는 게릴라전을 펼쳐 양민 희생은 불가피하며 전쟁의 규모와 기간 등에 비춰보면 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는 아주 적은 편"이라는 반박도 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에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려면 우리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해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도 "자유 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국가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참전자들을 매도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민간인 피해의 진상과 규모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긴 하지만 양민 학살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민간인 6명을 사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된 김종수 소위를 비롯해 월남전 기간 10여 명이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이런 뉴스는 외신에서는 여러 차례 보도됐지만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군대에서 내부 고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다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1968년 3월 미군 부대가 민간인 300∼500명을 학살한 '밀라이 사건'이 현장에 있던 한 병사의 편지와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대조를 이룬다.

올해로 종전 43주년을 맞지만 베트남전은 우리에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를 '민족해방전쟁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으로 보는 견해와 '자유 월남 패망'으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립하다 보니 참전 한국군을 보는 눈도 '미제(美帝)의 용병'과 '반공의 십자군'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과 법적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며, 월남참전자회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제기한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참전자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도 두통과 피부질환 등 고엽제 피해를 호소하고 있으며,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라이따이한(한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은 양국의 외면과 차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한국은 베트남인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고 참전자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대신 이른바 베트남전 특수를 누렸다. 1965∼1973년 참전 기간 장병들이 보내준 돈과 기업들이 축적한 자금은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됐고, 베트남 건설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는 몇 년 뒤 중동 시장에서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베트남 덕에 경제성장을 먼저 이룩한 우리가베트남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 그래야만 베트남을 비롯한 이웃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 나라들에 대해서도 떳떳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베트남은 동남아 최대의 교역 파트너이자 국제결혼으로 맺어진 사돈의 나라이기도 하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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