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독립선언문은 누가 낭독?…"경성의전 학생 유력"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지금까지 알려진 정재용은 아닌 듯"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오늘로부터 99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 학생과 시민 약 5천명 앞에서 연단에 올라선 '누군가'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라며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했다. 이게 우리에게 잘 알려진 3·1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독립 시위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비슷한 시각 탑골공원과 150m 떨어진 인사동 태화관.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이 일어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비폭력 저항'을 이유로 공원에 가지 않고 곧바로 경찰에 자수했다. 이에 혼란스러워하는 군중 앞에서 '누군가'가 나서 미리 받아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다.
그동안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를 대신해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한 인물이 누군지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게 당시 경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용이라는 인물이다. 일제 치하에서 그는 옥고를 치르며 항일운동에 진력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최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안물이 정재용이 아니라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이하 경성의전)에 다니던 학생이라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1일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열린 '3.1운동 99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조강연을 통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건 지금까지 알려진 정재용이 아니라 당시 경성의전에 다니던 학생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그 근거로 독립운동가인 운암 김성숙의 대담 책자와 당시 일본 순사의 증언 사료 등을 제시했다.
신 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일본 경찰은 당시 대학모 모양의 캡 모자를 쓴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중절모를 쓰고 두루마리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 정재용의 복장과는 많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당시 불교학림(동국대학 전신) 학생 신분으로 탑골공원 집회에 앉아있던 김성숙 옹도 정재용이 아닌 경성의전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증언했다"면서 "그 학생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일부 사학자들은 당시 경성의전에 다니면서 학생대표 모임을 주도하고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식 참가를 종용한 한위건(1896~1937)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위건은 3·1 만세운동 이후 경성의전 2학년을 중퇴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후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공산당 지도부로 활동했다. 그는 이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대 교수는 "3·1 운동이 있기 전의 여러 정황과 탑골공원의 목격자 증언을 등을 종합해볼 때 정재용보다는 한위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게 유력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실제로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김상태 교수가 사료를 분석해 이날 세미나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3월 1일 경성의전 강의실 흑판에는 "탑골공원으로 모여라"라는 내용의 글이 게시돼 있었으며, 학생들끼리 독립선언에 관한 대화가 계속됐다. 또 오후 1시 30분 학교장 훈화 시간에는 학생들이 이미 탑골공원에 몰려가 출석률이 높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위건은 이 과정에서 학교의 총연락책을 맡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상태 교수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3·1 운동 심문조서를 보면 당시 한위건의 활약상이 뚜렷했다"면서 "물론 한위건이 낭독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겠지만, 현재까지의 고증으로는 정재용보다 한위건이 낭독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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