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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민족음악의 선구자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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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민족음악의 선구자 채동선

(서울=연합뉴스) "본사 학예부 주최의 채동선 제금(바이올린) 독주회는 예정대로 이십팔일 밤에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열리게 되었던바 며칠 전부터 사방에서 들어오던 축전은 시작될 임시에는 더욱 장수를 늘리었을 뿐만 아니라 시각 전에 물밀듯 밀려드는 청객으로 대만원을 이루고 정각이 되어 본 사원의 개회사가 끝나자 반주자 스투데니씨의 뒤를 이어 등단한 씨는 만장의 열광한 박수 소리 속에서 씨의 독특한 고전 멜로디를 풀어놓게 되니 듣는 사람들은 거기에 도취하여 씨야말로 조선의 음악계의 명성임을 다시금 칭송하게 되었다더라." (동아일보 1929. 11. 30. '악단에 새로 썬세순을 준 채동선 제금 독주')
6년간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29년 9월 귀국한 채동선이 11월 28일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그의 연주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2월 2일은 65년 전 채동선이 사망한 날이다. 그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을 몇 달 앞두고 고된 부산 피난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52세로 생을 마감했다.
채동선은 일제강점기 조선 음악계를 이끌던 동료 음악가들이 일제의 어용 음악에 동원됐을 때도 이에 굴하지 않았던 민족음악의 선구자였다.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났다.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기고보(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1918년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회에 갔다가 감동을 받아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1924년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러 미국으로 떠났던 채동선은 중도에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가서 베를린 슈테르텐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1929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 활동했다. 서울에서 귀국독주회를 포함, 1939년까지 4차례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 4중주단 '채동선실내악단'을 만들어 실내악을 보급했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지도하기도 했다. 1930년 2월 11일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되자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2년 소공동 하세가와(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창작발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를 포함하여 그가 작곡한 곡들이 발표됐다.
그는 서양 음악을 소개하는 한편 민족 정서를 담아내는 곡들을 만들어 냈다. 그의 곡들은 민족적 색채와 향토적 특색을 잘 그려냈다. 1937년에는 첫 작곡집이 발간됐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많은 음악가가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을 했으나 채동선은 이를 거부하고 은둔했다. 서울 근교 수유리에 땅을 장만해 채소와 관상수, 화초를 키웠다. 창씨개명도 않고 흰색 한복에 두루마기,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날마다 성북동 집에서 수유리까지 걸어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우리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이 시기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다졌다.
해방되자 채동선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채동선은 민족주의 음악가들의 단합을 역설했다. 1945년 고려음악협회를 창설, 회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8월 그의 관현악곡 '조선'을 고려교향악단이 초연했다. 1948년에는 고려합창단을 조직했다.
그는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해방 이전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가곡형태에서 벗어나 애국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칸타타 '조국,' '독립축전곡,' '한강' 등이 있고, 국경일에 부를 수 있도록 '3.1절의 노래,' '개천절의 노래,' '선열추모가,' '무궁화의 노래' 등을 작곡, 각급 학교에 보급했다.
문화 관련 활동으로 한국문필가협회 부위원장 (1947), 고려작곡가협회 회장 (1947),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1947),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부위원장 (1947), 문교부 예술위원 (1949), 한국음악가협회 중앙위원(1949), 국립극장 운영위원 (1950), 국악원 이사(1950), 예술원 회원 (1952)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으며, 1952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과 숙명여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채동선은 1933년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을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유명 소프라노였던 누이동생 채선엽의 도쿄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돼 조선인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채동선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일제 치하에 짓밟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들을 가사로 해서 '향수,' '압천,' '산엣 색시 들녘 사내,' '다른 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 '바다,' '풍랑몽'을 잇달아 작곡했다.
그러나 정지용이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고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으로 작품이 금지되면서 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도 발표할 수 없게 됐다. 정지용의 작품은 1988년 납·월북작가 해금 조치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채동선 사후 '고향'을 그대로 묻어둘 수 없었던 부인은 생전에 남편과 가깝게 지냈던 이은상에게 작사를 부탁했고, 이은상 작사로 1964년 '그리워(망향)'라는 새로운 가사의 노래가 나왔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보네…"
이 노래의 선율에 반했던 시인 박화목 역시 '망향'이라는 제목으로 노랫말을 붙였고, 서울대 음대 교수였던 소프라노 이관옥도 직접 가사를 작사, '고향 그리워'라는 노래를 불렀다. 결국, 곡조 하나에 가사가 넷인 노래가 됐다.



채동선은 일제강점기부터 남다른 열정으로 민요를 채보, 편곡하고 전통음악을 발굴했다. 이 작업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판소리 '춘향가,' 민요 '육자배기'를 악보로 옮겼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서울아리랑,'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흥타령,' '뱃노래' 등도 그가 편곡했다.
채동선은 부산 피난시절 친구에게서 양담배를 얻어 장사했는데 고지식한 성격 탓에 종일토록 한 갑도 팔지 못한 날이 많았다고 한다. 국제시장 한구석에서 통조림과 과자 장사도 했다고 하고 막노동을 했다고도 하는데 고생 끝에 결국 영양실조와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작품 '무궁화의 노래'는 오선지가 없어서 흰 종이에 오선을 그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피난을 떠나기 전 채동선은 자신의 악보들을 독에 넣고 철판으로 싸서 성북동 집 마당에 묻었다. 1963년 부인이 이 악보들을 찾아내면서 10주기가 되어서야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됐다. 1964년 2월 미발표 작품을 수록한 채동선가곡집이 발간됐다. 1980년에는 채동선작곡집이 출간됐다.



보성군은 1989년 채동선기념비를 벌교 공원에 세웠다. 2007년 벌교읍에 채동선음악당이 문을 열었다.
지금도 '고향,' '추억,' '동백꽃,' '그 창가에,' '동해,' '갈매기' 등 채동선이 남긴 아름다운 가곡들이 애창되고 있다.
민족음악의 선구자로서 채동선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많은 음악가가 일제를 위한 선동 음악을 만들어 내던 시절,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채동선. 흔들리지 않고 우리 겨레 고유의 정서를 음악으로 풀어내며 작곡과 연주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다. 실로 우리 음악사에 기억할 만한 거목이라 하겠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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