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가치가 먼저라고? 금융화에 포획된 경제 통념을 버려라
신간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애플은 왜 곳간에 돈을 산더미로 쌓아두고도 은행에서 170억달러(18조원)나 되는 빚을 냈을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세계 곳곳의 은행 계좌에 있던 1천450억달러(155조원) 이상의 돈 중 일부라도 미국으로 반입하려면 적지 않은 세금을 내야 했는데 저리의 은행 대출 비용이 그보다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애플은 2013년 이렇게 빌린 돈을 시설투자나 제품개발이 아니라 자사주 매입과 거액의 배당으로 주가를 부양하는 데 썼다. 덕분에 애플의 주가는 치솟았고 주주들은 투자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애플만이 아니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통한 주가 관리는 이제 블루칩으로 불리는 초우량기업들에겐 상식이 됐다.
신간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부키 펴냄)는 대기업들이 번 돈을 제품이나 서비스의 개발과 생산에 투자하지 않고 갖가지 금융기법을 동원한 돈놀이에 몰두하는 것을 금융화(financialization)의 병폐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파이낸셜타임스, 뉴스위크, 타임 등에서 20년 넘게 경제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라나 포루하다.
금융화는 기업을 일구고 실물 경제에 이바지해야 할 금융 시스템이 그 자체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며 비대해져 실물 경제의 건전성을 해치는 현상을 가리킨다.
책은 금융화가 저성장, 불평등, 시장의 불안정, 경제 위기와 같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금융화는 치고 빠지면 그만이라 식의 단기적 사고를 조장하고 확산한다. 여기에 충실하다 보면 기업의 사회적 효용이나 미래의 가치는 안중에 없게 된다.
경제와 사회가 금융에 휘둘려 근시안적인 기업문화가 자리 잡게 되면 생산성과 혁신을 창출하기 어렵게 된다. 생산성과 혁신은 장기 투자와 연구개발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대개의 투자자는 이를 기다리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경제 성장을 이끌어야 할 금융이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려 도리어 성장을 가로막게 된다.
책은 이런 금융화의 폐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애플을 든다.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의 혁신이 멈춰버린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소니, 인텔, 코닥, 마이크로소프트, 제너럴일렉트릭, 시스코, AT&T, 화이자, 휴렛팩커드 등 다른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책은 금융화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공고히 해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통계 수치들도 제시한다.
미국 금융화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80~1990년대 탈규제 정책과 함께 본격화됐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더욱 가속화됐다. 미국 경제에서 금융은 생산 총액의 7%를 차지하고 일자리의 4%를 담당하면서 전체 기업 수익의 25% 가져간다.
책 제목에서 메이커스(makers), '만드는 자들'은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이끄는 사람, 기업, 아이디어, 즉 실물 경제를 지칭한다. 반면 테이커스(takers), '거저먹는 자들'은 금융이 실물 경제를 지배하는 전도된 경제를 이용해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치며 자기 배만 불리는 금융업자와 금융기관, 이를 방조하는 정치인과 규제 당국을 가리킨다.
책은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부이자 우리에겐 오랜 선망의 대상이었던 월가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나아가 우리가 받아들여 진리처럼 내면화한 미국식 경제 통념들을 뒤집는다.
기업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운영돼야 한다는 주주가치 우선주의나 신용이 팽창할수록 성장에 좋다는 금융 주도의 성장주의, 노동의 유연성, 비용 일변도의 조직 효율화 등등.
저자는 우리를 지배하는 이런 관념들이 미국 경제를 병들게 한 금융화의 부산물이라고 본다. 올바른 경제 해법이 되기는커녕 해악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흔히 경제 전문가들이 현자의 금언이나 되는 듯 주워섬기는 '시장이 가장 잘 안다'는 말도 금융화에 포획됐거나 투항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저자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임에도 여전히 경제와 시장을 잘 안다는 이유로 월가 금융업자들의 손에 금융 정책을 내맡기고 있는 미국의 위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와 함께 금융 시스템을 실물 경제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재구축할 것을 촉구하며, 금융을 실물 경제의 조력자라는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시스템을 단순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부채를 줄이고 자기자본을 늘리고,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저먹는 자들'이 아니라 '만드는 자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드는 것이다.
"이미 2008년 금융위기와 뒤이은 경기 침체가 보여주었듯, 금융화는 더 이상 성장에 기여할 수 없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한, 동등한 접근권이 보장된 공정한 시장이 필요하다. 금전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은 정치경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공이자 목적이 아니라 기업의 동반자임을 잘 알고 있는 금융 부문이 필요하다."
이유영 옮김. 532쪽. 1만8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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