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제소하면 이겼지만…미국이 시간 끌면 피해는 기업 몫(종합)
과거 11건 중 8건 승소…美, 패소해도 세이프가드 3년 채워
산업부 "세이프가드는 승소시 바로 보복 가능…유효한 수단"
(서울=연합뉴스) 김동현 기자 = 정부가 과거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경우 대부분 승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유리한 판정을 얻어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미국이 판정 결과를 이행하지 않아 우리 기업 피해가 누적되는 등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24일 WTO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미국을 상대로 11차례 WTO에 제소했다.
11건 중 8건은 우리 정부에 유리한 판정이 나왔고 1건은 패소했다. 2건은 판정까지 가기 전에 종료됐다.
승소한 경우 제소에서 최종 판정, 그리고 미국의 이행까지 짧아도 2년 가까이 걸렸고, 세이프가드의 경우 미국이 WTO 협정이 허용한 3년 시한을 다 채우고 철회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미국을 제소한 첫 사례인 1997년 컬러TV 수신기 반덤핑 관세는 분쟁해결패널 구성 전에 미국이 관세를 철폐했다.
1997년 DRAM(디램) 반도체 반덤핑 관세는 한국에 유리한 판정이 나왔고 미국이 2000년 5년 일몰 재심에서 관세를 연장하지 않아 양국 합의로 종결됐다.
1999년 스테인리스 강판 코일 등에 대한 반덤핑 관세는 2001년 2월 한국에 유리한 판정이 나왔고, 미국은 2001년 9월 WTO 권고를 이행했다.
미국은 2000년 2월 탄소강관에 세이프가드를 발령했고, 정부는 같은 해 6월 WTO에 제소했다.
WTO는 2002년 2월 세이프가드가 위법하다고 최종 판정했지만, 미국은 시간을 더 끌었고 결국 세이프가드 시한인 3년을 채운 뒤인 2003년 3월에 조치를 해제했다.
2000년 12월 우리나라는 유럽연합(EU), 일본, 인도, 태국, 브라질, 칠레 등과 공동으로 미국의 관세법 수정안에 대해 제소했다.
WTO는 이 법을 철폐하라는 최종 판정을 내린 뒤에도 미국이 이를 따르지 않자 2004년 11월 한국 등 7개국이 제출한 보복관세 신청을 승인했다.
미국은 2002년 3월 여러 철강 품목에 고율 관세와 할당, 수입허가제 등을 포함한 세이프가드를 발령했고, 정부는 같은 달 WTO에 제소했다.
당시 분쟁에는 한국 외에 EU, 일본, 스위스, 캐나다, 베네수엘라, 노르웨이, 중국, 멕시코, 뉴질랜드가 미국을 함께 제소했다.
WTO는 2003년 11월 미국의 세이프가드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는 내용의 판정 결과를 회람했고, 미국은 2003년 12월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세이프가드를 철회했다.
2009년에는 미국이 스테인리스 박판과 후판, 다이아몬드 절삭공구 등 3개 제품에 덤핑마진 계산방법인 '제로잉'을 적용한 것을 제소했다.
WTO는 2011년 1월 제로잉이 WTO 협정에 위배된다고 최종 판정했고 미국은 2011년 12월 판정 내용을 완전히 이행했다고 보고했다.
우리나라가 2013년 8월 제소한 세탁기 반덤핑·상계 관세는 2016년 9월 최종 승소했다.
그러나 기다릴 여유가 없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그 사이 미국 수출기지를 베트남과 중국 등으로 옮겨야 했다.
미국은 작년 12월 26일까지 세탁기 판정을 이행해야 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지난 22일 WTO에 미국에 대한 보복관세 승인을 요청했다.
2014년 12월 제소한 유정용 강관 반덤핑 관세는 우리나라가 일부 승소했고 지난 12일 미국이 상소를 포기함에 따라 판정 결과가 확정됐다.
반면, 2003년 하이닉스 DRAM 분쟁은 1심에서 미국의 상계 관세 부과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2005년 최종심은 한국에 유리한 내용을 뒤집어 사실상 미국 손을 들어줬다.
2011년 1월 제소한 철강판재류 반덤핑 관세는 한국 정부가 2012년 6월 분쟁해결패널 구성 중단을 요청한 이후 관련 절차가 더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사례 때문에 통상 전문가와 업계에는 정부가 태양광 전지·모듈과 세탁기 세이프가드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꺼낸 WTO 제소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심쩍게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조현수 한화큐셀코리아 대표이사는 전날 '에너지업계 신년인사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제소를 준비 중인데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미국과 추진하겠다는 보상 협의도 성사 가능성이 크지 않다.
WTO 협정은 회원국이 세이프가드를 시행하는 경우 다른 품목 관세를 인하하는 등 적절한 방식으로 상대국에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산업부도 미국이 보상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제 정부는 2002년 5월 미국의 철강 세이프가드에 대한 보상조치로 다른 수출품목의 관세 면제와 한국산 철강재에 부과되는 반덤핑·상계 관세 철회를 요구한 적이 있다.
당시 정부는 세이프가드 첫해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피해액 약 1억7천156만 달러 상당의 보상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전혀 보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WTO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한국을 비롯한 58개 회원국은 지난 22일 열린 WTO 분쟁해결기구(DSB) 정례회의에서 전임자 사임이나 임기 만료로 공석인 WTO 상소기구 위원 3명을 새로 선임하는 절차를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미국은 WTO가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에 제동을 거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상소기구 위원 선임 절차가 시작돼야 우리나라도 작년 8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사직으로 빈자리에 후임을 추천할 수 있다.
산업부는 그럼에도 세이프가드가 유효한 대응 수단이라는 입장이다.
세이프가드는 반덤핑 분쟁과 달리 상대국이 판정 결과를 이행할 때까지 최대 15개월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승소하면 바로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 상대국에 대한 압박이 더 크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WTO 제소로 세이프가드 기간을 1년이라도 단축할 수 있으면 우리 기업이 수천억원의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또 세이프가드의 구조는 유사하기 때문에 한 번 승소하면 미국이 다음에 비슷한 세이프가드를 하기 어렵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산업부는 설명했다.
blue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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