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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궁' 정조의 활쏘기 실력 정점은 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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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궁' 정조의 활쏘기 실력 정점은 40세"
장을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원, 학술지 '규장각'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활쏘기에서는 또 타고난 천분이어서 50발 중에 49발을 (정확히) 쏘았는데, 이때 왕은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가득 차면 못 쓰는 것이다.' 했다."(정조실록 1권 '정조대왕 천릉지문' 중 일부)
규장각과 장용영을 세워 문(文)과 무(武)를 개혁하고자 했던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실록에 나온 대로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 '명궁'(名弓) 혹은 '신궁'(神弓)이라고 할 만했다.
국왕의 동정을 기록한 '일성록'에 따르면 1792년 10월 22일 여러 신하가 각 10순(1순=5발)을 쏘았는데, 윤행임이 12발을 과녁에 맞혔고 서영보는 5발을 적중시켰다. 50발 중에 고작 한두 발만 맞힌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각종 문헌에 기록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어떠했을까. 장을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최근 간행한 학술지 '규장각'에 게재된 논문에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분석했다.
장 연구원은 "정조에게 활쏘기는 심신수양이라는 이상적인 가치보다는 상무정신에 입각한 문무의 겸비, 실전 대비를 위한 무예 연마의 현실적 수단이었다"며 "현재 남아 있는 정조 재위 기간의 활쏘기 기록은 262건"이라고 설명했다.
정조의 첫 활쏘기 기록은 '추행갱재첩'에서 찾을 수 있다. 정조는 숙종 탄생일을 맞아 1787년 8월 고양행궁에 행차했을 때 문무 신하와 함께 활쏘기를 했다.
이날 활쏘기는 39회에 걸쳐 이뤄졌는데, 회당 5발의 화살이 제공됐다. 정조는 첫 번째와 38번째 사수로 나와 5발씩을 모두 명중시켰다. 정조 외에 5발을 맞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조의 활쏘기 기록은 1787년부터 1798년까지 전하는데, 그는 5천760발을 발사해 3천966발을 적중한 것으로 나타났다. 적중률은 68.9%였다. 적중률은 1790∼1793년에 80% 안팎으로 높았으나, 1795년 이후 하락세를 보였다.
장 연구원은 정조 활쏘기 실력의 정점을 찾기 위해 뛰어난 체력과 집중도를 요구하는 10순 활쏘기(한번에 50발을 쏘는 것) 기록을 살폈다.
정조의 10순 활쏘기는 1790년과 1791년에 각각 3회와 1회에 불과했으나, 1792년에는 32회로 매우 많았다. 이후 1793년부터 1798년까지는 모두 합해 15회였다.
아울러 정조가 10순 50발 가운데 49발을 맞히는 '몰기'(沒技)에 성공한 시기도 1792년이 15회로 가장 많았고, 1790년과 1793년에 각 1회와 2회였다.
이에 대해 장 연구원은 "몰기는 정조의 활쏘기 솜씨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면서 "정조가 40세였던 1792년에 체력적으로나 기량 면에서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장 연구원은 이어 "정조대 이후 국왕의 활쏘기 횟수는 현저히 감소했다"며 "정조의 활쏘기 기록은 규모의 방대함과 내용의 상세함 측면에서 연구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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