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대체한 성탄절, 1930년대부터 대중의 축제로 정착"
염원희 교수, 한국의 새로운 명절 된 크리스마스 분석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가족과 연인이 모여 파티를 즐기고,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는 크리스마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은 한국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이 축제일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염원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는 크리스마스의 도입 과정을 분석한 논문과 책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에 실은 원고에서 개화기에 서양식 달력 체계인 양력(陽曆)이 들어오면서 크리스마스가 동지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음력을 쇠던 조선인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은 어디까지나 밤이 가장 긴 동지였다"면서 "동지와 크리스마스 중 하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동지의 자리에 크리스마스가 들어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양력과 개신교의 영향으로 성탄·신정·구정(설)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말연시의 절기가 한국사회에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크리스마스는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기독교를 알릴 좋은 기회였다. 선교사들은 교회에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든 뒤 사람을 초대했고, 아이들에게 학용품이나 과자를 선물했다.
신문과 잡지를 비롯해 각종 기록을 살펴본 염 교수는 종교적 행사로 인식됐던 크리스마스가 1930년대부터 대중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윤치호는 1933년 12월 24일 일기에 "크리스마스가 서울 중산층에게 또 하나의 석가탄신일이 됐다"며 "여성들이 관심을 두는 건 크리스마스가 쇼핑을 위한 또 하나의 핑곗거리이자 기회라는 사실이다"라고 적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염 교수는 "경성이라는 도시가 급격하게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며 "현재의 충무로를 중심으로 최대 번화가인 '혼마치'(本町)가 생겨났고, 향락적인 소비문화를 배경으로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의미와 거리가 먼 날로 탈바꿈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만끽하는 문화는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점차 위축됐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난 뒤 크리스마스를 향한 열망은 다시 살아났다. 1960년대에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도시의 댄스홀이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염 교수는 이승만 정권이 크리스마스를 공식적인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크리스마스가 향락의 밤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통행금지로 인해 밤에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했던 시대에 12월 31일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통금이 해제되는 날이 크리스마스였다"며 "1982년에 통금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기 전까지 크리스마스의 밤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염 교수는 "크리스마스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년이 넘으면서 개인의 종교적 사정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기념하는 날이자 주기적으로 지내는 명절이 됐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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