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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내전' 예멘의 비극 1천일…"사상 최악의 인도적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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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내전' 예멘의 비극 1천일…"사상 최악의 인도적 참사"
1만명 죽고 700만명 아사 위기…전국민 3분의 2 구호로 연명
빈곤·내분·외세개입으로 꽃 못피운 민주화…참극 소용돌이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2015년 2월 반군 후티의 쿠데타로 예멘 남부 항구도시 아덴까지 쫓긴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예멘 대통령은 마지막 보루 아덴까지 위협받자 그해 3월24일 사우디아라비아에 긴급히 'SOS'를 쳤다.
반군의 배후가 이란이라고 본 사우디는 자신의 턱밑에 이란이 교두보를 확보하기 직전의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 이틀 뒤인 26일 전격적으로 예멘 반군 공습을 단행하면서 내전에 개입한다.
살만 국왕이 즉위한 지 불과 두 달만이었다. 당시 30세로 사우디 국방장관에 오른 살만 국왕의 친아들 모하마드 빈살만(현재 왕세자)이 국제무대에 데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우디도 그때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압도적인 공군력을 앞세우고 기갑부대, 특수부대까지 동원하면 예멘 반군을 금세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로 개입 26일 만에 작전명을 '단호한 폭풍'에서 '희망의 복원'으로 바꿨다.
사우디의 바람대로 희망은 복원되지 않았고, 그렇게 시작한 예멘 내전이 20일로 1천일이 지났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빈국으로 꼽히던 예멘은 유혈사태와 전염병으로 사상 최악의 비극이 진행 중이다.



2014년 9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대테러전의 모범 사례로 들었던 중동 국가이자 모카커피의 원산지로 더 유명했던 예멘은 나락으로 내전과 함께 추락했다.
중동의 다른 내전 전장인 시리아는 세계열강이 평화 협상을 이끌면서 종식되리라는 희망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라도 하지만 예멘은 말 그대로 '잊힌 내전'이다.
국제 사회는 수없이 말로만 '우려'를 쏟아내기만 했을 뿐 실질적인 휴전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다.
그 사이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 동맹군의 폭격, 반군의 반격, 전통적 강자인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 새로 둥지를 튼 이슬람국가(IS)가 뒤섞여 피아가 구분되지 않은 혼돈이 거듭되고 있다.
최근 전세계 유명인사 350명이 조직한 '예멘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이름의 온라인 모임은 18일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예멘 내전은 중동의 최빈국을 전세계 최악의 인도적 위기로 몰아넣었다"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에 즉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프랑스 구호단체 ACTED에 따르면 예멘 전체 인구의 3분의 2인 2천200만명이 외부의 호품과 비상식량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천일 동안 8천600여명이 폭격과 교전 등으로 숨졌고, 약 2천명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인구의 70%인 2천만명이 끼니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700만명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로 아사 위기에 처했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UNICEF)은 1천100만여명의 어린이에게 긴급 지원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예멘 내전은 2010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이 가장 나쁜 결과를 낳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예멘은 2011년 말 벌어진 민주화 시위로 이듬해 2월, 34년을 철권통치한 독재자 알리 압둘라 살레(2017년 12월 사망)가 하야하면서 앞날에 대한 희망이 부풀었다.
민주화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진 이집트, 바레인, 리비아 등과 다르게 예멘은 튀니지와 함께 아랍의 봄 결실을 맛보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장기 독재의 깊은 뿌리는 예멘의 민주주의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살레 시절 부통령이던 하디가 2년 임기의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불행히도 하디 정권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고 합법성을 갖췄음에도 정치·군사적 기반이 취약했다.
하디 대통령의 개인 역량 부족일 수도 있지만 그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환경은 민주화를 꽃피우기엔 열악했다.
의회 다수당 국민의회당(GPC)은 여전히 퇴출당한 독재자 살레의 통제 아래였고 군부에서도 살레의 영향력이 건재했다. 하디 대통령은 군 고위 인사의 개혁을 단행, 살레의 장남과 조카 등 측근을 제거하긴 했지만 이는 군 전력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에 맞서야 할 이슬라당, 남부 사회주의 정파 등 야권은 정치 개혁과 민생보다는 정부 요직에 자신의 세력을 심는 눈앞의 이득에 더 관심이 있었다.과거 적대적이었지만 정권 획득이라는 목표 아래 살레 전 대통령과 전략적으로 내통한 후티는 끊임없이 하디 대통령 정부를 흔들어댔다.
후티가 2014년 9월 수도 사나로 진입했을 때 예멘 정부군은 이를 저지할 전투력이 없었고 살레 편에 선 일부 군장교는 후티의 '진격'을 환영했다.
평화적 정권이양을 맡은 과도 정부에 반기를 든 후티가 쉽게 민심을 얻게 된 배경엔 무엇보다 '빵' 문제가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후티가 본격적으로 반정부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은 하디 정부가 재정을 개혁한다며 2014년 7월 정부 재정의 3분의 1(연간 약 20억달러)을 차지하는 연료 보조금을 축소하면서부터다.
이 결정으로 휘발유 가격이 60%, 경유는 95%가 폭등했다.
연료값이 치솟자 하디 정권에 반대하는 민심이 들끓었고 후티는 이를 틈 타 반정부 시위에 앞장서며 지지 기반을 넓혔다.
후티와 하디 정부는 연방제식 정권 이양 절차를 논의하는 듯했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합의가 결렬되고 내전의 싹이 텄다.
결국 2015년 2월 후티는 쿠데타로 하디 정부를 남부 아덴으로 몰아내고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북부를 장악하고 남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사우디가 그해 3월 군사 개입하면서 기나긴 내전이 시작됐다.
아랍의 봄 이후 내분과 빈곤으로 민주화 절차를 이행하지 못한데다 외세의 개입이 겹치면서 예멘은 헤어날 수 없는 참극의 소용돌이로 말려들어간 것이다.



hska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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