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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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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난민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25일 오후 서울 강북구 미아동 신일고 체육관. '레게파마' 머리에 피부가 검은 복서가 링에 올랐다. 전형적인 아프리카 흑인이지만 경기복 트렁크 허리에는 한글로 '이흑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 5월 슈퍼웰터급(69.85㎏ 이하) 한국 챔피언에 오른 그는 이날 처음으로 펼친 국제전에서 일본의 바바 가즈히로 선수를 3라운드 2분 54초 만에 KO로 눕히고 승리를 거뒀다.


본명이 압둘레이 아싼인 이흑산(34)의 국적은 폴 비야 대통령이 35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는 카메룬. 초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배고픔을 면하려고 복싱 선수가 됐다가 군에 스카우트됐다. 그러나 군대에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고 무리한 체중 감량을 강요하는가 하면 구타를 일삼자 2015년 10월 경북 문경에서 열린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 카메룬 대표로 참가했다가 선수단을 이탈해 난민 신청을 냈다.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가 '증거 불충분'으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내리자 이흑산은 이의신청을 낸 뒤 한국 챔피언 타이틀이 있으면 쉽게 송환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프로로 전향해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했다. 법무부는 "추가 심사를 한 결과 박해받을 것이라는 근거가 충분하고 선수단 이탈과 난민 신청 사실이 고국에 알려져 위험이 가중됐다고 판단했다"며 7월 18일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 이흑산은 내년 4월 아시아 챔피언인 한국의 정마루 선수와 타이틀 매치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복서로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로드워크를 하고 샌드백을 두들기면서 '코리안 드림'을 키워가고 있다.




#2. 소피아 킴(46)은 미얀마 서부 산지에 사는 소수민족 친족이다. 고향에서 결혼해 딸 캐롤라인을 낳았으나 남편의 외도 탓에 1년 만에 이혼했다. 미얀마는 불교국가지만 친족 중에는 개신교 신자가 많다. 소피아는 1996년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긴 채 필리핀으로 유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나이지리아 출신 시리우스(58)를 만나 재혼했는데 친족 거주지에서는 외국인 출입을 금지해 가족이 모여 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인 목사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2003년 세 식구가 한국에 들어왔다.


소피아 가족은 한국인 목사 집에 살며 그의 일을 돕고 틈틈이 막노동으로 생활비를 보탰다. 한국에 온 지 4년쯤 됐을 때 한국인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절망에 빠졌다. 다행히 당국은 개신교인인 시리우스가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면 이슬람교도의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해 2007년 난민 아래 단계인 인도적 체류자로 결정했고, 가족결합 원칙에 따라 소피아와 캐롤라인도 함께 머물 수 있게 됐다. 난민에게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대우를 해주지만 인도적 체류자에게는 취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만 부여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캐롤라인은 간호대 4학년에 재학 중이고, 한국에서 낳은 아들 제이콥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도 이들 네 식구는 각기 희망을 가꾸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3. 10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네거리에서는 흑인 10여 명이 빨강·검정·초록의 삼색기와 태극기를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비아프라 토착민인 이들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탄압을 폭로하며 도움을 호소했다. 비아프라인들은 1967년 5월 나이지리아 남동부 3개 주에서 비아프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가 3년간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내전을 치렀는데, 그 뒤로도 지금까지 탄압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지나는 시민은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나이가 지긋한 몇몇 사람은 흥미를 나타냈다. 아마도 내전 당시 굶주림에 시달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난민 아동들의 사진이 뉴스로 보도돼 한동안 비쩍 마른 사람을 보면 '비아프라 난민 같다'고 놀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 10월 말 기준으로 대한민국에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모두 3만82명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가 1992년 유엔 난민지위협약에 가입한 데 이어 1994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해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3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1990년대만 해도 난민 신청자가 한 해 수십 명에 불과했으나 2011년 1천 명을 넘어섰고 올해는 1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난민 인정을 받은 숫자는 767명에 불과하고 1천446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난민인정률은 3% 수준이어서 전 세계 평균 38%에 훨씬 못 미친다.



우리나라는 북쪽이 휴전선으로 막혔고 중국·일본 사이에 바다가 있는 데다 가까운 난민 발생국도 없어 집단으로 난민이 들어오지 않는다. 탈북민은 법령상 특수한 지위여서 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난민 신청자가 늘어난 것은 일부 외국인의 눈에 한국이 잘살고 인권친화적인 나라로 인식돼 있고, 인천국제공항이 허브공항으로 떠오르면서 환승 도중 신청하는 사례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한국전쟁으로 6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생겨났을 때 선진국은 물론 미얀마, 라이베리아, 이라크, 스리랑카, 시리아 등도 구호에 나섰다"면서 "난민에게 작은 환대를 베풀고 연대하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국가의 책무인 만큼 위험을 피해 한국 땅을 찾은 사람들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영국의 한 동포는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정말로 어려운 사람들은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고 한국까지 올 수 없는데 정부와 법원과 언론사가 가짜 난민에게 속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터넷에서는 난민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글도 있지만 난민이 몰려올 것을 걱정하며 엄격하게 심사해야 한다는 글이 대부분이다.



난민 문제는 아프리카나 중동 등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새 우리 곁에 가깝게 다가와 있다. 요즘도 병역 거부자나 성 소수자 등 한국인이 프랑스나 호주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례가 있다. 먼 나라 이야기나 남의 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난민을 어떻게 대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해결 방법을 다 함께 찾아야 할 때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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