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고 싶지만 책임져야 하는 것은…영화 '아기와 나'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이 남자의 처지, 보는 사람마저 속이 터진다. 군 입대 후 태어난 아기는 벌써 훌쩍 컸다. 전역을 앞두고 휴가를 나온 남자는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다. 그 사이 아기 엄마가 도망갔다. 설상가상으로, 알고 보니 남자의 아기도 아니다.
영화 '아기와 나'는 결혼 날짜까지 잡아두고 돌연 사라진 여자의 행방을 쫓는 남자의 분투기다. 엄마 아빠가 조금 어리긴 하지만 나름대로 단란한 가족이었다. 도일(이이경 분)은 휴가를 나오며 아기에게 줄 모형 자동차를 사 왔고, 순영(정연주)은 남자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뒀다.
하지만 가족애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헬스장에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요즘은 트레이너 자격증에 학벌까지 따진다. 생계는 막막하고 돈 들어갈 데는 많다. 순영이 떠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기와 남았다. 아기는 종일 시끄럽기까지 하다. 도일은 군대에 갇혀 있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딸린 아기가 없어도, 취업전쟁에 뛰어들기 직전의 말년 병장은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한다.
도일은 아기를 업고, 안고, 유모차에 태운 채 순영의 행방을 추적한다. 탐문은 집요하지만 딱히 손에 잡히는 건 없다. 여자가 왜 떠났으며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여자의 행방과 비밀을 밝히는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니라, 아기와 함께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며 좌절을 반복하는 사이 조금씩 달라지는 남자의 성장담이다. 그러나 그 변화마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느리게 전개되고, 실패한 시도만 쌓인다.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청년의 불안과 두려움은 도일이 처한 분통 터지는 상황을 통해 극대화된다.
아기를 '정리' 또는 '처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주변엔 부추기거나 돕겠다는 사람도 여럿이다. 도일은 갈등한다. 미련 때문은 아니다. 순영에 대한 감정은 사랑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피하고 싶지만 맞부딪치고, 책임까지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도일은 알아간다. 복잡한 표정의 도일이 한밤중 유모차를 끌고 한강 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 읽힌다.
영화는 순영이 도망간 사연보다는 도일의 감정과 선택에 집중한다. 손태겸 감독은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로 어떻게 행동했다고 적시하듯 풀지 않았다"며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속에는 지난한 자기만의 사정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드라마 '고백부부'에서 장발을 한 채 코믹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이이경이 113분의 러닝타임 거의 내내 카메라에 잡히며 도일의 불안과 혼란을 세밀하게 연기한다. 정연주는 당찬 공무원 역을 맡은 '아이 캔 스피크'에 이어 존재감을 과시한다. 단편 '야간비행'으로 2011년 칸 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에서 수상한 손태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2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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