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허상을 떠도는 고독의 풍경
리산 시인 두 번째 시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첫 시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2013)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리산 시인이 4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창비)를 냈다.
메르시, 앙코르, 앙상블, 까자흐, 캄차카, 뉴올리언스, 푸얼 등 이국땅의 낯선 지명과 생경한 언어들이 소환돼 현실의 익숙한 풍경과 뭉뚱그려지며 독특한 정서를 자아낸다.
"19세기 말 박애주의 기업가들은 자기 공장에 도서관을 만들어 제법 호응을 얻었다//아니나 다를까 사회주의자들은 도서관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속이기 위한 마약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그러거나 말거나 뒤셀도르프 지역에서는 바이엘 화학 도서관과 제강회사의 도서관이 가장 컸는데 노동자의 반 정도가 정기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했다//바이엘 화학은 당신도 알고 있는 아스피린을 개발한 회사다//(중략)//그늘진 건물을 나와 그늘진 청계천 변을 걸어가면 달보다 먼 석양의 바닷가 폐관 시간을 앞둔 서울도서관이 있다" (시 '정확한 페이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
건조한 도시에서 하루하루 같은 리듬으로 노동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현실 또는 허상에서 마주하는 고독의 이미지도 엿보인다.
"서울고용노동청 깃발이 황사바람에 펄럭인다/어쩐지 당신은 울고 싶다/교차로 사색 신호등은 허공에 걸린 한줄의 선/누가 허공을 건너 저편으로 간다/멸시당하고 싶은 날이 있다/마음이 아프기 전 몸이 먼저 눕고/누운 몸을 따라 눕느라 마음은 아프다/(중략)/종로구 송월동 기상관측소에서 관측된 가시거리는 1킬로미터 이하/체감온도는 5.9도 하강/마지막 호송선이 교차로를 지날 때" (시 '종의 기원' 중)
반면 시인이 소환하는 이국의 땅은 어떤 혁명의 기운을 담고 있는 듯하다.
"세상 저편엔 삼천년 된 차나무가 사는 곳이 있다고 한다//그곳에선 돌로 눌러 둥그런 모양으로 차를 말리는데/찻잎이 마르는 동안 사람들은/바람결에 전해지는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몇번인가의 혁명 전야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중략)//활활 타오르는 잉걸불 도자기 속에 잘 식지 않을 찻물을 끓이며//그 밤 내 마신 심홍빛 차에서는 흙과 뿌리와 이슬의 맛이 났었지"(시 '푸얼 방향으로' 중)
리산 시인은 '센티멘털 노동자 동맹'이라는 사뭇 도발적인 이름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성호 시인은 추천사로 "시인은 고독의 말을 타고 '허망함과 허무'를 여행하고, '흙과 뿌리와 이슬의 맛'(시 '푸얼 방향으로' 중 인용)을 만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에서 광기와 도발과 충격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우리에게 아무런 맛도 나눠주지 않고 나아간다"고 말했다.
116쪽. 8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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