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2,455.91

  • 48.76
  • 1.95%
코스닥

678.19

  • 16.20
  • 2.33%
1/3

[르포] 1979년에 멈춘 시간…"여긴 간첩 소굴" 테헤란 美대사관

페이스북 노출 0

핀(구독)!


글자 크기 설정

번역-

G언어 선택

  • 한국어
  • 영어
  • 일본어
  • 중국어(간체)
  • 중국어(번체)
  • 베트남어
[르포] 1979년에 멈춘 시간…"여긴 간첩 소굴" 테헤란 美대사관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1979년 11월 4일은 이란뿐 아니라 전 세계 역사가 소용돌이에 휩싸인 날이다.

이란 이슬람 혁명이 성공한 지 9개월이 지난 늦가을.

테헤란은 '반미'의 도시였다. 이슬람 혁명으로 에너지를 쌓은 반미 감정이 과잉 팽창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친미 팔레비 왕정을 전복한 혁명 세력의 다음 목표는 미국 대사관이었다.

1979년 11월 4일 드디어 방아쇠가 당겨졌다.

아침 7시부터 테헤란 남부 미 대사관 앞에 400여 명의 대학생이 모였고 이들은 "미국에 죽음을", "카터를 죽여라"라고 외쳤다.

대표자 몇몇이 대사관 진입계획을 세웠다.

한 여학생이 검은 차도르 안에 숨긴 절단기로 정문 쇠사슬을 끊으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처음엔 상징적인 수준으로 점거 농성을 잠깐 벌이려고 했지만, 오전 10시께 정문이 뚫리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학생 수백 명이 쇠창살에도 개의치 않고 4m 정도의 담을 넘었고, 순식간에 미 대사관을 점거했다.

혁명 지도자 이맘 호메이니는 처음엔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밤 "두 번째 혁명이 성공했다"면서 "미 대사관은 간첩의 소굴이다"라고 지지함으로써 이란 혁명사에 영웅적 성공으로 기록됐다.

이들은 미국 외교관과 직원 52명을 무려 444일간이나 인질로 잡고 '대미 항전'을 벌였다. 미국과 이란의 국교가 끊어지고 대이란 경제 제재가 시작된 계기가 됐다.

이란 정부는 아직도 이 '승리의 기념관'을 유지하면서 그날을 되새기고 있다.

공식 명칭은 '어반 13일의 박물관'이다. 11월 4일이 이란력으로 8번째 달인 '어반'의 13번째 날이다.

5만 리얄(약 1천500원)을 내면 입장할 수 있다.




미 대사관은 가로로 긴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벽돌 건물이다.

현관 앞에 고철이 된 항공기 엔진을 조각품처럼 전시해놓은 것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조형물이 아니라 '미국의 치욕'을 증명하는 전리품이다.

억류된 미국인 인질을 구하려고 1980년 4월 25일 미군 특수부대가 이란 중부 타바스 사막에 헬리콥터 8대에 나눠타고 착륙을 시도했다. 갑자기 모래폭풍이 불었고 통제 불능이 된 헬리콥터가 수송기와 도미노식으로 충돌하면서 폭발해 버렸다.

특수부대는 허겁지겁 탈출했으며, 구출작전은 사망자 8명과 헬리콥터와 수송기 잔해만 남기고 실패했다.

할리우드 영화 '아르고'에선 포악한 이란 혁명군을 따돌린 미국 정보기관의 극적인 탈출 작전이 그려졌지만, 이는 캐나다 대사관으로 겨우 피신한 미국 외교관 6명의 '작은 성공담'에 불과하다.

미국은 30년이 더 지났지만, 영화로라도 '정신승리'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그래서 1979년의 테헤란이 미국엔 현재 진행하는 치욕의 시공간이라는 반증인 셈이다.

대사관은 2층만 개방한다.

내부 벽은 반미 벽화와 점거한 시위대의 혁명 구호로 채워졌다.


벽에 걸린 포스터에 요약된 미 대사관 점거 이유는 두 가지다.

미국은 1953년 당시 왕정을 뒤엎은 공화정이던 이란이 석유를 국유화하자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 팔레비 왕정을 복원하는 내정간섭과 자원 수탈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혁명 뒤 암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도피한 팔레비 왕정의 레쟈 샤를 이란 혁명법정에 세우려고 했지만 미국이 송환을 거부했다는 이유다.

이런 시각은 역사가들의 평가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각 방에 전시된 물품은 대학생들의 급습에 얼마나 미국 외교관들이 당황했는지를 고스란히 웅변한다.

시위대가 몰려들자 당시 대사관 안에선 최루탄을 쏘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기밀문서를 닥치는 대로, 필사적으로 파기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쓰던 암호 변환기능의 텔렉스, 수동 타자기, 전화기, 위성 송수신기가 이란엔 모두 '간첩질'의 증거가 됐다.

타다만 종이뭉치와 '태우시오'라고 적힌 문서 파기용 종이봉투가 온전히 보존돼 그날의 급박함을 영화 아르고만큼 생생하게 전달한다.

박물관 가이드는 2층 복도 끝 방으로 안내하면서 "문의 두께를 보라"고 했다. 10㎝ 정도의 철문이 그 방이 비밀스러운 일을 했던 곳이었다는 점을 대변했다.

CIA 요원이 이란의 기밀 정보를 위성을 통해 본국으로 송신하는 그야말로 '간첩의 소굴'이라고 했다.

방을 가득 채운 서버 모양의 송수신 장치, 대형 문서 파쇄기, 암호 해독 장치를 보면 가이드의 설명이 과장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인질이 모진 고생을 했다는 서방 언론에 반박하는 설명이 이어졌다.

가이드는 "1979년 크리스마스에 인질들이 코카콜라를 마시며 파티를 했고, 점거한 대학생들보다 식사가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화려한 촛대에 불을 켜놓고 간소하지만 음식을 장만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인질의 모습이 담긴 벽에 붙은 흑백사진과 신문 보도를 볼 수 있다.

미 대사관을 찾은 11월 4일 건물 앞 탈레거니 도로엔 38년 전 '승리의 날'을 기념하는 시위대 수만 명이 운집했다.

이들은 그날 아침 같은 곳에 모였던 대학생들처럼 "마르그 바르 엄메리카"(미국에 죽음을)이라고 목청껏 외쳤다.

불붙은 성조기에 환호하고, 미국 정부와 트럼프 대통령을 '악마'라고 부르며 적대했다.

이 순간만은 그들에게 1979년 11월인 것처럼 보였다.






hska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염색되는 샴푸, 대나무수 화장품 뜬다

실시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