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의 벗' 故 정일우 신부 다큐 개봉
김동원 감독 "가난의 가치를 잊은 시대에 불빛 되길"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1960년. 스물다섯 살 미국인 청년이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는다.
앳된 청년은 196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4년 뒤 한국에 돌아와 평생을 산다. 훗날 '빈민운동의 대부'가 된 고(故) 정일우(미국명 존 빈센트 데일리) 신부다.
정 신부는 서강대에서 강의하던 1972년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잡혀간 학생들을 위해 단식 투쟁을 했고, 이후 청계천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살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80년대 빈민들의 자립을 위해 만들어 판 '복음자리 딸기잼', 1998년 귀화한 뒤 충북 괴산에 터 잡았던 농촌 운동…. 민중과 부대끼는 시간이 켜켜이 쌓일수록 '치약주세요'를 '쥐약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말이 어눌했던 청년은 '능구'(능구렁이)라는 별명의 우리네 할아버지가 됐다.
그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네 명의 내레이터가 등장한다.
예수회 한국관구 전주희 수사, 평생의 동지였던 고(故) 제정구 의원의 부인 신명자(복음자리 이사장) 씨, 1980년대 노원구 상계동 철거촌에서 정 신부와 함께 살았던 김동원 감독, 괴산에서 함께 농사를 지었던 김의열 농부는 저마다 가진 기억을 풀어놓는다. 여기에 지난 세월 이곳저곳에 남은 기록 영상을 촘촘히 이어붙였다.
남은 자들의 기억 속 '정일우'는 그저 친구다. 한 할머니는 "나랑 동갑이야"라며 자랑스러워하고, 故 김수환 추기경은 정 신부의 환갑잔치에서 "나도 환갑 안 치렀는데 무슨 염치냐"며 친근한 핀잔을 준다.
누군가에겐 위로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철거민이 엉엉 울자 정 신부는 "가난뱅이들이 이 나라의 희망이오"라며 함께 운다. "높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 교육받은 사람이 이 나라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일을 안 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건 가난한 사람들뿐"이라며 그들의 곁을 지킨다.
종교적 다큐멘터리가 자칫 대상의 신격화로 빠질 수 있지만 영화는 정 신부의 약한 모습까지 골고루 비춘다. 2004년 중풍에 걸린 그는 어린아이처럼 음식을 받아먹고, 종종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자유자재로 쓰던 한국어마저 알아듣지 못한다. 그의 시계태엽이 가장 나약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고, 2014년 숨을 거둔다.
김동원 감독은 20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시사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정 신부님에게 갈등 요소가 없었다"며 연출 과정의 고충을 토로했다.
김 감독은 "예수회 안에서 갈등도 있었을 테고 제정구 전 의원과도 싸움이 잦았지만, 그럼에도 주변에서 정 신부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며 "그래서 병상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떠나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을 더 낮추는 정도로밖에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 신부님이 지향하던 공동체 생활과 가난한 산동네 사람들은 사라졌다"며 "아득한 옛날얘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신부님이 추구하던 '가난'이 이 세상에 밝은 불빛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흥행 기록을 얼마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는 "사실 별생각이 없다"며 "유튜브에 (무료로) 뿌리려던 건데 영화관에 개봉하게 됐으니 입장료는 최소한이었으면 좋겠고, 감동은 무한대로 받아가시라"고 웃으며 답했다.
'내 친구 정일우'는 오는 26일 개봉한다. 고(故)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 '울지마 톤즈'(2010·44만)가 역대 다큐멘터리 흥행 기록 3위에 오른 만큼, '내 친구 정일우'도 또 다른 잔잔한 기적을 만들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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