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지기 군자금 대며 항일투쟁 김병희 父子 의병장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 109년 만에 행적 발굴 서훈 신청
(하동=연합뉴스) 지성호 기자 = 경남 양산 출신 김병희(1851년∼1908년)·교상(1872년∼1908년) 부자(父子)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영남 동부지역에서 일제와 싸웠다.
김병희 의병장은 부친 김재복 씨가 이룬 만석지기 재산을 물려받은데다 학식과 덕망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동몽교관(童蒙敎官·초등학교 교사)으로 많은 후진을 양성해 제자들이 많았다.
나라가 위기에 닥치자 그는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아들 김교상 의병장을 통해 인근 지역까지 돌렸다.
이를 전해 들은 제자와 지인들은 선생의 뜻에 적극 동참, 구국의 대의에 목숨 걸고 투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는 재산을 모두 군자금으로 쓰며 최신 화기를 사들이고 포수를 고용해 사병을 양성했다.
그는 아들 김교상 의병장과 서병희 의병장 등 의병들을 막강한 재력으로 사들인 최신 화기로 무장시켰다.
양총(대한제국 군대가 사용했던 서양 신식무기 군총)과 권총, 스나이더총(미국산), 마르티니헨리소총, 대구경총 등을 두루 갖췄다.
당시 의병의 주력 무기는 화승총과 도검류였다.
화승총은 1정당 3∼4명이 한 조를 이뤄 사격을 했다.
이에 비해 양총은 화승총의 20배 이상 화력을 갖춘 무기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들 때문에 김병희 의병장은 '만석꾼 의병장'으로 불렸다.
아들 김교상 의병장은 서병희 의병장과 합세해 영남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에 나서 일제에 큰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 당시 일본군에겐 최신 화기로 무장한 김교상 의병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들 부자는 일본군에게 주요 제거 대상이었다.
일제는 1908년 6월 양산군 상북면에서 이들 부자를 체포했다.
이에따라 김교상은 같은 달 20일 상북면 대석골에서, 김병희는 22일 양산 통도사 앞산에서 각각 57세와 36세로 일본군 총탄에 생을 마감했다.
만석꾼 의병장 부자의 이런 행적은 지역 사학자 등에 의해 109년 만에 발굴됐다.
하동에 있는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주택박물관에 소장 중인 '진중일지(1908년 일본군 보병작성)' 등에서 이들 부자가 서병희 의병장에게 군자금 5천엔을 지원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찾았다고 16일 밝혔다.
그 돈을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50억원에 해당된다고 정 소장은 추산했다.
또 당시 대대급 규모의 의병을 최신 무기로 완전 무장하고 2∼3년간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정 소장은 이들 부자가 영남지역에서 의병 200여 명을 규합해 최신 화기로 무장하고 양산·밀양·울산·부산·경주·청도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내용이 적힌 문건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정 소장은 1908년 세운 김병희 의병장 묘비 비문과 김교상 의병장의 사망일을 확인할 수 있는 제적등본, 경주 김씨 족보 등에서 구체적 행적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에 이들 부자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정 소장은 "그동안 김 부자에 관한 기록은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폭도에 관한 편책', 양산지역 향토지 등에 활약상이 기록돼 있지만, 사료가 충분하지 못해 정부 서훈을 추진할 수 없었다"라며 "김병희 의병장의 후손과 양산역사문화연구소 관계자 등이 7년간에 걸친 사료수집으로 신청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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